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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커피콩이 적혈구처럼 혈관 속을 돌아다니는 상상을

 카렌 블릭센 원작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 묘사된 은공 언덕의 커피농장

커피가 위장에 들어가면 기억은 힘차게 뛰어오르고 글자들은 춤을 춘다 

 

직유가 발기하고 종이는 잉크로 뒤덮이기 시작하지. 

투쟁이 시작되고 검은 잉크의 급류로 뒤덮이는 거야

오노레 드 발자크       

             

  “일단 아침 커피를 마셔야겠어요.” 노벨문학상 수상자 루이스 글릭의 수상 소감이었다. 얼마나 많은 커피가 그녀의 시(詩) 안으로 들어갔을까. 어쩌면 시에서 커피 향이 묻어날지 모른다. 글릭에게 시는 '삶을 잃지 않으려는 본능적인 노력' 중 하나였다. '망각에서 돌아오는 것은 무엇이든 목소리를 찾기 위해 돌아오는 것'이라는 그녀의 말처럼 우리가 무언가를 기억하는 것은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기 위함이다. 그녀는 너머의 세계에서도

일단 아침 커피를 마시는 일로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이른 아침 서둘러 일을 마치고 커피 한 잔을 들고 나만의 테이블로 걸어가는 일은 하루를 여는 고귀한 의식이다. 뜨거운 블랙커피가 목구멍을 타고 위장 속으로 그리고 온몸 곳곳으로 스며들 때 나는 비로소 깨어난다. 

  스스로를 ‘문장 노동자’라 칭한 오노레 드 발자크가 평생 동안 마신 커피가 5만 잔에 달한다고 한다. 새벽 1시~8시까지 눈이 침침하고 손이 뻣뻣해질 때까지 글을 쓰고 또 썼는데 그걸 가능하게 해 준 게 커피라고 했다.

  "커피가 위장에 들어가면 아이디어는 전장에 뛰어든 육군 포병부대처럼 날렵하게 움직여 전투를 시작하지. 기억은 힘차게 뛰어오르고 전차와 탄약으로 무장한 논리의 포병이 뛰기 시작하네. 위트가 명사수의 자세로 꼿꼿이 일어서고 직유가 발기하고 종이는 잉크로 뒤덮이기 시작하지. 투쟁이 시작되고 검은 잉크의 급류로 뒤덮이는 거야.”

  바로 옆에서 오노레 드 발자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어떤 커피를 마실까 고민한다. 상큼한 꽃 향기와 입안에서 느껴지는 산뜻함, 달콤함이 매력적인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진하고 풍부하며 섬세하면서 달콤한 '로브스타 우간다', 쌉쌀한 맛, 단맛, 신맛, 쓴맛을 모두 가진 '케냐 AA', 고소함과 진한 초콜릿 향, 부드러운 신맛을 가진 ‘콜롬비아 수프리모'. 커피를 소개하는 문구들이 현란하다. 모두 섞어 뜨거운 물을 부으면 달콤하고 화사하고 섬세하고 매력적이며 진하고 풍부하며 고소하고 조화로우며 부드럽고 상큼하고 완벽한 맛의 커피가 될까? 

  나는 커피가 주는 수많은 맛 중 ‘쓴맛’을 좋아한다. 섬세한 쓴맛, 상큼한 쓴맛, 풍부한 쓴맛, 완벽한 쓴맛, 조화로운 쓴맛, 달콤한 쓴맛,.. ‘쓰다’라는 동사는 꽤 매력적이다. 커피 맛이 ‘쓰다’와 글을 ‘쓰다’. 나는 종이 위에 '씀'이라고 적는다. 쓴 커피를 마시며 오늘 나는 무언가를 쓰고 있지만 쓰는 일은 즐거운 일이기도 하고 즐겁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손끝에서 꿈틀거리며 태어나는 글자들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어쩌면 오노레 드 발자크의 손가락 끝에서 태어난 글은 그가 마신 5만 잔의 커피가 쓴 글인지도 모른다.

  완벽하고 섬세하고 진하고 부드러우며 조화롭고 달콤하고 매력적인 커피 맛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듯 내가 쓰는 글도 완벽하고 섬세하고 진하고 부드러우며 조화롭고 달콤하고 매력적인 글은 아니다. 지금 나는 적당히 쓴맛의 커피를 마시며 적당히 쓴맛 나는 글을 쓰고 있다. 그래도 언젠가는 섬세하고 조화로우며 완벽하게 쓴맛 나는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여전히 무언가를 적고 있다. 

  뜨거운 커피가 위장 안으로 들어가면 나는 커피 열매를 처음 맛본 에티오피아 산골마을 카파의 염소가 되어 푸른 들판을 달린다. 흥분한 염소들과 목동 칼디의 노래, 파란 하늘과 내리쬐는 햇살 한 줌, 쏟아지는 빗줄기, 커피 농장에서 커피콩을 따는 여인의 분주한 손길, 분쇄기 속 커피콩 부딪치는 소리들이 모두 커피 한 잔에 뒤섞여있다. 

  오래된 기억의 더미에서 숨죽이던 기억들이 다시 힘차게 연어처럼 뛰어오르고 감성과 직유가 발기한다. 한 잔의 커피가 만들어 낸 검은 글자들이 종이 위에서 일어나 격렬하게 춤을 추기 시작한다. 


아프리카로부터는 항상 무언가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    

      

 야생과 불규칙성의 땅. 회녹색 땅 사이로 보이는 선명한 녹색. 커피 재배는 길고 지루한 일이다. 하지만  희망에 찬 농장주는 세찬 비를 맞으며 반짝이는 어린 커피나무 묘목이 든 상자들을 실어 오고 가려줄 빽빽한 그늘을 만들어준다. 4~5년이 되어야 나무들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데 어떤 나무들은 원뿌리가 구부러져 꽃이 피자마자 바로 죽는다.  커피 농장이 눈부시게 아름다울 때가 있다. 우기가 시작되면서 커피나무에 꽃이 피면 6백 에이커가 넘는 땅 위에 안개와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에서 마치 분필가루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듯한 화사한 광경이 연출된다. 커피 꽃은 블랙손 꽃처럼 쌉싸래한 향이 난다. 잘 익은 커피 열매가 밭을 붉게 물들이면 사람들은 모두 커피 열매를 땄고 우마차와 수레가 열매를 강 근처 공장으로 실어 날랐다. 대형 커피 건조기가 무쇠 배 속에 커피 열매를 담고 해변의 조약돌이 파도에 씻기는 듯한 소리를 내며 덜거덕덜거덕 돌아갔다. 어떤 때는 한밤 중에 열매껍질들 천지인 캄캄하고 넓은 공장에 등불이 무수히 걸리고 건조기를 둘러싼 열성적인 검은 얼굴들이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림 같은 장면이 펼쳐졌으며 공장이 마치 에티오피아인의 귀에 걸린 반짝이는 보석처럼 거대한 아프리카의 밤 한가운데에 빛을 발하며 걸려 있는 것 같았다. 건조된 커피 열매는 껍질을 벗기고 등급을 매기고 손으로 골라내는 작업을 거쳐 자루에 담는다. 그 모든 작업이 끝나면 아직 어둑어둑한 새벽에 커피 자루들을 우마차에 실었고 우마차 한 대당 열여섯 마리의 황소가 배치되어 공장이 있는 긴 언덕길을 올라 나이로비 기차역으로 갔다. 저녁이 되면 지친 황소들이 빈 우마차를 끌고 고개를 푹 숙인 채 터벅터벅 걸어왔다. 커피는 하루 이틀이면 배에 실려 바다를 건널 것이고 런던 경매 시장에서 행운이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비를 기다리지만 비는 오지 않는다. 만물의 색이 바랬으며 들판과 숲의 냄새도 사라졌다.  날이 갈수록 농장의 미래와 희망은 빛을 잃어버렸다. 농장 일은 속도가 느려지더니 결국 멈춰버렸다. 시들어 가는 열매를 전부 따내어 나무라도 살려야 할지, 그대로 두어야 할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서리가 내리는 추운 계절에는 커피나무의 새 가지와 그 위의 어린 열매가 모두 갈색으로 시들어있었다. 은공 지역은 비도 부족해서 세 차례나 극심한 가뭄을 겪었고 해마다 수확량은 바닥을 쳤다. 건조한 날씨와 초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커피나무가 시들고 잎은 노랗게 변했다. 언덕과 숲, 초원, 강, 바람까지 작별의 시간을 암시하고 있었다. 빛과 그림자가 은공 언덕의 풍경을 공유하고 있었다.

                                                                             카렌 블릭센 『 아웃 오브 아프리카 』 부분      

 


시드니 폴락 감독의 영화로 더 알려진 카렌 블릭센의 자전적 소설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 묘사된 커피 농장 이야기다. 커피 농사를 짓기에는 적합지 않은 고도에 위치한 은공 언덕, 아프리카 대륙이 1800미터 높이를 통해 증류되어 정련된 독한 정수만이 남아있는 듯한 풍경에서 아프리카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느끼며 살아간 카렌의 열 일곱 해 동안의 기록이다. 

  빨간 커피 열매를 따는 분주한 손, 건조기를 둘러싼 열성적인 검은 얼굴들이 불빛을 받아 반짝일 때 커피 농장은 모처럼 활기를 띠지만 기후는 순진한 희망을 수시로 비웃는다. 지독한 가뭄, 수확량 감소, 원두 가격 폭락... 카렌은 마침내 은공 언덕의 커피 농장을 접는다. 탄력 있는 빨간 생두 알알이 검고 단단한 원두로 변해가듯 카렌의 마음도 커피를 닮아갔다.                   


  오스트리아 빈에서만 5대의 낡은 피아노를 가지고 39번 이사할 정도로 가난한 베토벤은 커피 마니아였다. 한 잔의 커피를 추출하기 위해 항상 60알의 원두를 사용했는데 ‘한 잔의 커피를 만드는 원두는 60가지 좋은 아이디어를 가르쳐 준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가 남긴 불후의 명곡은 결국 원두 60알의 몸짓들이 만든 결과물이다..  

  커피의 유래와 기원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자면 6세기경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지역에 살던 양치기 소년 칼디는 빨간 열매를 먹은 한 무리의 염소들이 평소와 달리 예민해지는 것을 보고 직접 열매를 따 먹어보았는데 춤출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고 한다. 이후 유목 생활을 하는 이슬람교도들은 빨간 열매를 가지고 다니며 약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아랍으로 전파되어 수피교도들이 밤 기도를 드릴 때 잠을 쫓기 위해 즐겨 먹었다고 전해진다.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유럽으로 전파되었는데 유럽에서는 이교도들이 들여온 음료 때문에 사람들이 음탕한 생활을 한다고 믿어 커피를 ‘사탄의 음료’라 부르기도 했다, 18세기 프랑스 정치가이자 외교관인 탈레랑이 남긴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거우며 천사처럼 아름답고 사랑처럼 달콤하다”는 말은 커피의 모든 것을 표현한다.  


  새빨간 커피 열매가 악마처럼 검은 커피 한 잔으로 변하기까지 여러 차례의 공정이 필요하다. 커피 열매가 온전히 검은색이 될 때 수확해서 햇볕에서 말려 생두를 얻기도 하고 익은 커피 열매를 세척하고 껍질을 벗겨 건조해 생두를 얻는 방식도 있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 생산된 생두는 로스팅을 거쳐 원두로 만들어진다. 로스팅은 생두에 열을 가해 볶는 과정으로 로스팅 정도에 따라 커피의 맛과 향과 깊이가 달라진다.

  

                                                                

작고 여린 흰 꽃이 피고 탱글탱글한 초록 열매가 붉게 물든다. 제각각 채도와 명도를 지닌 붉음이 둥글어지고 단단해지고 깊어지고 짙어진다, 잘 건조된 검붉은 열매 한 알은 광기와 유혹, 이성과 논리,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문학과 예술을 잉태한 자궁이다.    

흙 주름이 생긴 손으로 두 개의 붉은 심장을 움켜쥐고 있다. 마치 자기 안의 심장을 꺼낸 것처럼

“이것 좀 들여다봐요. 두근거리고 있어요. 살아있어요. 우리처럼, 우리 심장처럼”

여인들의 목소리가 조곤조곤 들려온다. 저 여인들의 손으로부터 건너온 빨간 커피알들이 혈관 속으로 스며 들어가 가슴을 노을빛으로 물들게 하고 뜨겁게 타오르게 했으리라.       

       
      


전통 방식으로 커피 원두를 빻아 신맛과 쓴맛이 도는 검은 가루를 만들고 있는 파키스탄의 두 여인. 돌절구 앞의 여인과 체를 든 여인... 수고로움 끝에 얻어지는 커피양은 작은 병 하나도 채우지 못할 것이다. 체념과 진지함이 묻어있는 여인들의 커피에선 검은 체념과 씁쓸한 진지함의 맛이 날 것이다.

   저마다 커피가 삶에서 갖는 의미는 다를 것이지만 커피가 없는 일상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책상 위의 커피는 오래전 칼디의 염소들로부터, 기도하는 이슬람교도로부터, 교황 클레멘스 8세로부터, 빨강 열매를 따고 씻고 건조하는 흙내 나는 여인들로부터, 건조된 커피콩을 등에 지고 나르는 황소들의 느린 걸음으로부터, 커피콩을 로스팅하는 누군가의 손으로부터 왔다. 

  빨간 커피콩이 적혈구처럼 혈관 속을 돌아다니는 상상을 해본다. 그 빨강의 힘으로 잠든 생각들을 깨우고 방황하는 활자들을 손끝에 연결한다. 자판 위를 달리는 검은 활자들은 모두 검붉은 커피콩이 걸어온 궤적이고 그들이 만들어낸 눈물 같은 것이다.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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