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이 내린 시간, 길 잃은 사람처럼 서성인다
이파리들이 어둠 속에 어떻게 떠다니는지 보라.
이파리들 위에 쓰여 있는 모든 걸
우리는 다 태우고 있다
- 루이즈 글릭 < 편지들 > 부분
어스름이 내리는 시간
산 그림자 진다.. 산이 가까운 곳이어서인지 어둠이 빨리 내린다.
먹이를 찾아 옥탑방 베란다까지 날아오던 새들은... 이 어둠 속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깊은 숲, 어딘가에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날갯죽지에 파묻고 잠을 청하고 있으리라
새들은 일조와 일몰에 예민한 종족이다.
집에 있는 앵무새... 새장이 있는 방, 불을 끄고 커튼을 내려주었다.
알에서 깨어나.. 어미의 보호조차 받지 못한 채 분양된 앵무새...
본능일까... 어둠의 농도에 따라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우리 집 앵무새도 고개를 날갯죽지 사이에 묻고 잠이 들었으리라.
모든 게 조용하다.
이른 저녁을 간단히 마치고 옥탑방 베란다를 서성인다.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 불 켜진 창 너머로 부엌을 서성이는 여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삼겹살 굽는 냄새, 된장찌개 냄새.. 그리고 고등어 굽는 냄새가 뒤섞인 저녁이다.
여인들의 손끝을 통해 그날의 마지막 만찬이 차려진다.
불 켜진 창..... 분주한 저녁...
음식 냄새 속 가을 냄새가 난다.
어린 날, 아버지를 따라 성묘 다녀오던 때. 해질 무렵
시골집에서 밥 하는 냄새가 그렇게 좋았다.
코스모스 흐드러진 길을 따라 들녘에서 풍겨오던 그 밥내음이 아직도 내 후각에 남아있다.
참 많은 시간이 흘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된장찌개와 가마솥에 밥과 함께 쪄낸 계란찜... 시골 숙모님이 준비한 소찬이었지만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아버지도 숙모님도 코스모스 흐드러진 들길도... 시골집도
이제는 기억 속에만 남아있다.
갈 곳을 잃은 사람처럼 베란다를 서성인다. 저 멀리 산 위의 점멸등이 별처럼 보인다.
인생의 시간으로 말하자면 지금은 몇 시쯤일까?
내 인생에도 저녁이 오겠지....
고개가 꺾일 듯 가는 허리 코스모스의 군무가 서러울 것이고
불어오는 바람에 슬픔이 묻어있으리라...
노랗게 익은 들판의 벼이삭이 베어지듯.... 어쩌면 우리들은 저마다 저녁의 순서대로 들판에서 사라질 것이다.
좀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많은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많은 것들로 채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리 살 지 못했지. 아쉽다.
가을이다. 고질병이 돋는 계절이다.
불 켜진 창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이 저녁.... 집집마다 동그란 테이블. 네모난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하루를 버무리고 있다.
오래전 어머니의 집..... 빈집, 짐을 정리하기 위해 꼭 이맘때의 시간
거실을 서성이던 때 생각이 난다. 유난히 근접해 있던 바로 뒷동 같은 층의 사람들 모습이 도드라져 보였다.
불 꺼진 창문으로 바라보는 불빛 환한 집... 온기를 나누고 곁을 나누고 밥솥을 열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나눌 어머니는 부재중이었다. 저녁을 먹는 시간대가 슬픔으로 각인된 것은 아마도 그 무렵부터였으리라.
가을이다.
분명 교과서에서는 풍요와 결실의 계절로 배워왔지만 내게 가을은 허허로운 계절이다.
심장의 한 부분이 요동을 친다.
어떤 책으로도... 그 어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시기다.
책상 위에 마시다 만 컵의 개수가 늘어난다.
식은 커피들....
마시다만 레몬수..
비가 내리고 있나 보다. 이 비는 가을을 재촉하는 비다.
위화의 소설 <인생>을 읽은 뒤라서일까. 씁쓸하고 쓸쓸한 기분이 더 강하게 드는 것은........./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