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첫날, 아직은 끝이 아닌 달
모든 꽃들은 열매가 되려 하고
모든 아침은 저녁이 되려 한다.
영원한 것은 지상에 없다.
변화와 도주밖에는
헤르만 헤세 < 시든 잎 > 부분
11월 첫날이다. 언제부터인가 11월이 좋아졌다. 쭉 뻗은 두 그루의 나무 같은 달. 숲으로 걸어가면 바삭거리는 잎들의 소리들.. 글러 떨어지는 열매들... 분주한 새들의 움직임
틈과 틈이 벌어져 보인다. 초록에 가리어있던 것이 온전히 드러나는 계절이다,
벗은 나무의 몸, 비어 가는 공간들........
무언가 촘촘하고 치밀한 것들이 듬성해진다. 그 성근 실 같은 느낌이 묘하게 위로를 준다.
모든 꽃이 시들 듯이
청춘이 나이에 굴복하듯이
생의 모든 과정과 지혜와 깨달음도
그때그때 피었다 지는 꽃처럼 영원하진 않으리.
삶이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은 슬퍼하지 않고 새로운 문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이별과 재출발의 각오를 해야만 한다.
모든 시작에는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어 그것이 우리를 지키고 살아가는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공간들을 하나씩 지나가야 한다.
헤르만 헤세 <유리알 유희> 중에서
꽃은 피고 진다.
나무도 풀도... 모두 피고 진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날마다 피고 날마다 지는 이도 있고 한 달 동안 피고 한 달 동안 지는 이도 ,
일 년 동안 피고 일 년 동안 지는 이도... 평생을 피고 평생을 지는 이도 있다.
단 한 번도 제대로 피어본 적 없는 단조로움 삶이지만 파란이 이는 삶보다야 좋은 삶이다.
‘일상’이라는 말이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 있는 말인가 문득 생각했다.
일상은 무덤덤한 돌기둥 같은 느낌. 아무 색채감도 없는 무채색 같은 느낌을 주지만 그 일상이 무너지면 삶을 살아내기 힘들어질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인생에서 무슨 특별한 업적을 내거나. 성공을 거두거나, 인류에 도움이 되는 위치에 있지 않는 한... 대부분의 우리는 단조로운 일상을 살아간다. 엄밀히 말하면 단조로운 일상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단조로운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고 있다.
11월. 아직은 끝나지 않은 달이다.
아직은 달력의 마지막 한 장이 뒤를 받쳐주고 있다.
이루지 못한 것들.... 이루고 싶은 것들...
아직은 접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한다.
늦은 가을과 초겨울의 분위기를 모두 지닌... 11월. 아직 끝나지 않은 달.
아직은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으며
아직은 충분히 꿈꿀 수 있으며
아직은 충분히 희망할 수 있는 달....
아직은 슬퍼하지도 아직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 려원
<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