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하나의 현재에서 또 다른 현재로 바삐 달려갈 뿐이다.
<시간의 향기 > 한병철
이미 일어난 것의 아직 일어나지 않음
(Noch-Nicht des Schon)
불 – 시 ( Un-Zeit)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의 현재에서 또 다른 현재로 바삐 달려갈 뿐이다.
.... 머뭇머뭇하는 사이에...
몇 가지 지속적인 것이 있다는
피리드리히 훨덜린
제때 죽는 일. 죽음은 삶이 고유하게 종결될 것을 전제한다. 죽음이란 종결의 형식인 것이다.
의미 있는 종결의 형식을 빼앗긴 삶은 불시에 중단될 수 있을 뿐이다. 종결 내지 완결이 불가능해지고 방향도 끝도 없는 전진, 영구적인 미완성과 새로운 시작만이 남아 있는 세계, 즉 삶이 하나의 형태로, 하나의 전체로 마무리되지 못하는 세계에서는 죽는 것이 쉽지 않다.
현대 사회에서 시간은 그 어디에서도 종결과 완결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시간을 붙들어주는 아무런 시간적 중력도 없기 때문에 마구 돌진할 뿐이다.
시간이 리듬을 잃어버린 채 받침대도 방향도 없이 막막한 곳으로 흘러가버린다면 어떤 적절한 시간도, 어떤 좋은 시간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어디론가 달려간다. 인생을 낭비하지 않기 위하여...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의 순환.
꽃들의 돌림노래를 보며 마음은 분주해진다.
어디론가... 마음은 이미 어디론가로 달려간다.
철쭉의 계절... 빨강 속으로.........
차라투스트라는 불시에 끝나버리는 삶에 맞서서 완전히 다른 방식의 죽음을 요구한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늦게 죽고 몇몇 사람들은 너무 빨리 죽는다. ‘제때 죽어라!’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이다.
제때 산 적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제때 죽을 수 있을까?
인간은 적절한 시간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적시’의 자리를 ‘불시’가 대신해 버린다.
니체는 ‘불시’에 끝나는 죽음이 아니라 삶 자체를 적극적으로 구성해 가는 죽음, 죽음의 완성을
이야기했다.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라는 이념은 ‘운명에 대한 사랑 amor fati’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운명이라는 시간은 복원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운명을 사랑하는 일...
제 때를 아는 일. 이루어야 할 일과 이루지 못할 일을 아는 일.
궁극적으로 완성을 향해 가는 일.
불시에 기습당하는 인생이 아닌 때를 준비하는 일...
부활절이었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는 제 때를 아는 이였다.
불시에 죽음으로부터 기습을 당한 이가 아닌 죽음이 다가오는 시간을 알고 죽음을 맞이하는 이였다.
그는 운명을 사랑하였으리라. 아모르파티 Amor fati
처절한 찬란함의 죽음을...
성야 미사가 시작되기 한 참 전에 가서 오래도록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1년 12달 365일 십자가에 못 박힌 채로 그는 세상을 향하고 있다.
비참한 자의 모습이 아닌 다 이룬 자의 모습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
오늘날 시간을 타는 사물들은 예전보다 훨씬 더 빨리 낡아버린다. 순식간에 과거의 것으로 전락하고 관심밖으로 밀려난다. 현재는 현재적인 것의 끝부분으로 축소되어 버리므로 현재는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시간은 가속화되는 것이 아니다. 가속화되려면 어떤 방향성을 전제로 해야 하는데 시간은 아무런 받침대도 가지고 있지 않다. 마치 산사태처럼 마구 무너져 내린다.
시간 지평들의 복합적 착종, 즉 이미 일어난 것의 아직 일어나지 않음 ( Noch-Nicht des Schon) 현재 속에 함축되어 현존하는 것을 해방시키고, 현재를 운동 속에 던져 넣는다.
변증법적 추동력은 이미 일어난 것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 과거와 미래 사이의 시간적 긴장에서 생겨난다.
이미 일어난 것은 과거, 아직 일어나지 않음은 미래인데 ' 이미 일어난 것의 아직 일어나지 않음'은 변증법적 추동력을 지닌 '현재'를 상징한다. 현재는 이미 일어난 것의 종결이 아닌 이미 일어난 것을 아직 일어나지 않음의 틈새로 밀어 넣는 역할을 한다.
내게 이미 일어난 것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 이미 일어난 것에 대해서 나는 받아들여야 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미리 알아차릴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있어 원인 제공자이면서 결과 수용자다.
다행히도 우리에게 '현재'는 과거의 '현재'이면서 미래의 '현재'이기도 하기에
우리는, 우리의 삶은, 우리의 시간은, 우리의 인생은 ' 이미 일어난 것의 아직 일어나지 않음' 사이에서 만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있는 것이다. 일어난 것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 사이에서 개인은 스스로 운명의 씨실과 날실을 짜는 자이다.
가속화된 행위의 불안은 잠 속에까지 연장된다. 불면의 밤에는 공식이 있다. 새벽이 찾아와 끝날 가망도 없이 공허한 지속을 잊으려는 허망한 노력 속에서 늘어지는 고통스러운 시간들... 아무런 결실도 없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불면의 밤. 조급성과 공허한 지속은 동일한 원천에서 나온 것이다.
낮의 조급성이 텅 빈 형식이 되어 밤을 지배한다. 공허한 지속에 내맡겨진 상태에서 잠을 자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허한 지속은 분절되지 않은 시간, 방향이 잡히지 않은 시간, 의미 있는 예전도 의미 있는 나중도 없고 기대도 기억도 없다.
불면의 밤, 불안의 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은 잠에서도 지속된다.
잠과 죽음의 차이는 다음 날을 맞이하는 가와 다음 생을 맞이하는 가의 차이일 뿐
죽음은 인생 밖에서 와서 인생을 불시에 종결시키는 폭력이다.
죽음이 인생, 삶의 시간 자체에서 돌출되는 결말이라면, 폭력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종결이 있을 때만 인간은 삶을 스스로 마지막까지 살 수 있고 제때에 죽을 수 있다.
두 배로 빨리 사는 사람은 두 배로 많은 삶의 가능성을 만끽할 수 있을까?
삶의 가속화로 인해 삶은 그만큼 배가되고 이로써 충만한 삶의 목표에 접근하게 되지만 충만한 삶이란 양적 논리로 정의될 수 없다.
가속화의 테제는 삶이 의미 있게 완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이 시작하고 ‘삶의 가능성들’ 사이에서 불안하게 우와좌왕한다.
가속화가 삶을 극대화시킨다는 주장은 부적절하다. 가속화란 삶이 하나의 가능성에서 다른 가능성으로 어지럽게 날아다니게 만드는 초조한 불안에 지나지 않는다.
삶은 점점 넓이를 잃어가고 있다. 어느 정도 넓이가 있어야 지속성도 지닐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삶이 분주해질수록 전체적인 파악도 어렵고 방향 설정도 어렵게 된다. 뚜렷하고 결정적인 결절점이 생겨나지 못하는 삶.
인생은 더 이상 단계, 완결, 문턱, 과도기 등으로 구분되지 않으며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의 현재에서 또 다른 현재로 바삐 달려갈 뿐이다.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지만 늙지는 않는다. 그러다가 불시에 끝나버리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죽은 것은 그 어느 시대보다 더 어려워진 것이다.
삶의 넓이를 잃어가는 시대
머뭇거림이 없는 시대....
나이 먹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시대. 늙음을 부정하고
현재에서 또 다른 현재로 질주하는 시대
돌아보지 않고 달려감을 탁월한 능력처럼 자랑하는 시대...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불시에
죽음의 신이 찾아와 문을 두드린다면
‘때’를 알지 못하고 살아온 날들에 대해 뒤늦은 회한이 밀려오리라.
질주하는 삶이 아닌.... 사색적 삶( Vita contemplativa! )을 살기로!/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