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모든 것은 어려운 것을 향한다. 썩지 않기 위하여 어려운 쪽을.
친애하는 카푸스씨
...
당신은 늘 당신 자신과 당신의 느낌이 옳다고 생각하십시오. 지금의 당신 견해가 틀렸다면 당신의 내면의 삶의 자연스러운 성장이 천천히 그리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당신을 다른 인식으로 이끌 것입니다. 당신의 생각이 주위로부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조용히 자라도록 두십시오. 그와 같은 성장은 모든 진보가 그렇듯이.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뻗쳐 나와야 하여, 그 무엇에 의해서도 강요되거나 재촉당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것은 산달이 되도록 가슴속에 잉태하였다가 분만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상과 느낌의 모든 싹이 완전히 자체 속에서, 어둠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속에서. 무의식 속에서, 우리 자신이 이성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것 속에서 완성에 이르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그러고 나서 깊은 겸손과 인내심을 갖고 새로운 명료함이 탄생하는 시간을 기다리십시오. 이것은 이해를 할 때나 창작을 할 때나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는 시간을 헤아리는 일이 통용되지 않습니다. 1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10년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술가는 나무처럼 성장해 가는 존재입니다. 수액을 재촉하지도 않고 봄 폭풍의 한가운데에 의연하게 서서 혹시 여름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일도 없는 나무처럼 말입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여름은 옵니다. 그러나 여름은 마치 자신들 앞에 영원의 시간이 놓여 있는 듯 아무 걱정도 없이 조용히 그리고 여유 있게 기다리는 참을성 있는 사람들에게만 찾아오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날마다 배우고 있습니다. 나는 오히려 내게 고맙기만 한 고통 속에서 그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인내가 모든 것이라고
.. 내 책들이 당신 곁에 함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탈리아근교의 비아레지오에서
1903년 4월 23일
친애하는 카푸스씨
...
모든 것을 자기 안에 품으려면 그는 마지막에 오는 존재여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이토록 바라는 존재가 이미 과거에 존재했다면, 우리의 존재는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 늘 기쁨과 자신감을 잃지 마십시오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1903년 12월 23일 로마
친애하는 카푸스씨
...
당신은 당신의 고독을 깨고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소망이 당신의 가슴속에 존재한다는 사실로 인해 당혹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바로 이와 같은 소망- 당신이 이 소망을 조용하고도 신중하게 그리고 마치 하나의 도구처럼 사용한다면-당신의 고독을 드넓은 땅 위로 펼치는 일을 도와줄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인습의 도움을 빌려) 모든 것을 쉬운 쪽으로만 해결해 왔습니다. 쉬운 것 중에서도 가장 쉬운 쪽으로만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운 것을 향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어려운 것을 향합니다. 자연 속의 모든 존재들은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자라며 자신들을 방어하고 또 안으로부터 제 특징을 만들어내며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리고 어떠한 저항에라도 맞서면서 그와 같은 고유성을 지키려고 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우리가 어려운 쪽을 향해야 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와 같은 확실성만이 우리를 지켜줄 것입니다. 고독하다는 것은 훌륭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독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무언가가 어렵다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 일을 사랑하는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
당신이 언젠가 소년이었을 때 당신에게 부과되었던 그 위대한 사랑이 사라졌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시에 이미 당신의 가슴속에서 위대하고 훌륭한 소망들과 의도들이 익어있지 않았다면 오늘날, 당신의 양식이 되어주고 있는 것들을 도대체 어디서 났겠습니까?
나는 그 사랑이 당신의 기억 속에 강력하고도 힘차게 살아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당신의 인생에서 첫 깊은 고독이었고 당신이 당신의 삶에 대해서 행한 첫 내면의 작업이었으니까요. 친애하는 카푸스씨. 당신이 하는 모든 일에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1904년 5월 14일 로마
1903년부터 1908년까지 만 5년 동안 릴케에게 인생과 문학과 관련하여 자신의 고민을 물어온 프란츠 크사퍼 카푸스와 주고받은 편지...
릴케는 편지에서
그리고 내가 당신한테 또 한 가지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음 같은 것입니다.
당신을 이렇게 위로하려 애쓰는 이 사람이 당신에게 가끔 위안이 되는 소박하고 조용한 말이나 하면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의 인생 역시 많은 어려움과 슬픔을 지니고 있으며 당신의 인생보다 훨씬 뒤처져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이 사람이 그러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한다.
모처럼 다시 꺼낸 책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라는 마지막 표현이 좋았다
당신의....라는 말이 연인에게만 쓰는 단어가 아닌 무언가 편지를 받는 이에게 예의와 존중을 담은 듯한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봄의 끝과 여름의 점이지대에서 비가 며칠째 이어지고 있다
마치 장마처럼... 이른 장마처럼..
나무처럼 성장해 가는 존재입니다. 수액을 재촉하지도 않고 봄 폭풍의 한가운데에 의연하게 서서 혹시 여름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일도 없는 나무처럼 말입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여름은 옵니다. 그러나 여름은 마치 자신들 앞에 영원의 시간이 놓여 있는 듯 아무 걱정도 없이 조용히 그리고 여유 있게 기다리는 참을성 있는 사람들에게만 찾아오는 것입니다.
<올여름의 인생공부>
모두가 바캉스를 떠난 파리에서
나는 묘비처럼 외로웠다.
...
그건 이제 썩을 일밖에 남지 않은 무르익은 참외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다르게 사랑하는 법
감추는 법 건너뛰는 법 부정하는 법.
그러면서 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아이처럼 배고파 울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아이처럼 웃을 것
한 아이와 재미있게 노는 다른 한 아이처럼 웃을 것.
-최승자
그러나 우리가 어려운 것을 향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어려운 것을 향합니다. 자연 속의 모든 존재들은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자라며 자신들을 방어하고 또 안으로부터 제 특징을 만들어내며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리고 어떠한 저항에라도 맞서면서 그와 같은 고유성을 지키려 한다
쉬운 것을 향하지 말고 어려운 것을 향하려 애쓰라.
살아있는 모든 것은 어려운 것을 향하고 있으니.
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다르게 사랑하는 법
감추는 법 건너뛰는 법 부정하는 법.
그러므로 올여름.... 다 익은 참외처럼 썩지 않으려면 쉬운 것을 향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어렵게 기도하고 어렵게 사랑하고
어렵게 감추고 어렵게 건너뛰고 어렵게 부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는 무엇을 하며 한 해의 절반을 보내버렸을까?
끝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지만 흐르는 시간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하염없이 비가 온다.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