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어쩌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 실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남아있는 것들 >
나에게 끄적거린 시들이 남아있고 그것들은 따뜻하고 축축하고 별 볼일 없을 테지만 내게는 반쯤 녹아버린 주석주전자가 남아있고 술을 담을 순 없지만 그걸 바라보는 내 퀭한 눈이 있고 그 속에 네가 있고.... 아침의 기슭엔 면도한 얼굴로 말끔하게 희망이, 오후가 되면 거뭇거뭇 올라오는 수염 같은 절망이 남아 있고,... 잘 묶인 매듭처럼 반드시 풀리는 나의 죽음이 남아 있고.
진은영 <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 시집
최선을 다해 잘 살아가고 싶지만
어쩌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 실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언젠가는 반드시... 현재 점유하고 있는 공간과 시간을 신에게 반납해야 할 시간, 무(無)로 돌아가는 그 시간이 올 것이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나 받아들이게 될 최선을 다한 실패에도 담담해질 수 있을까?
보통의 사람들에게 인생이란 소소한 성공 같은 것일까? 남을 염두에 두지 않고 비교하지 않는 자기 안의 만족일까? 아니면 최선을 다한 실패일까? 아니면 가까스로 최선을 다해 실패를 면한 안도 같은 것일까?
6월 한 해의 변곡점 같은 달이다.
나에겐 무엇이 남아있을까?
나에겐 말라버린 장미다발과 마구 뒤엉킨 책들과, 탑을 이룬 모자들과..... 쓰다만 종이들과...
메모들과.... 차마 버리지 못하는 것들, 희망과 절망의 공존하는 시간이. 정화되지 않은 것들이.. 기억들이..... 해야 할 일들이,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그러나 해야만 하는 일들이... 남아있다.
최선을 다해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아니? 최선을 다해 실패하기 위해서?
<빨강 수집가의 시간> 제1부 빨강의 기억 p58
언젠가 내게도
빨간 풍선 같은 소녀가 하나 있었지
...
너는 얼마나 멀리 날아갈까
네 몫의 어리석음으로부터
...
언젠가
내게도 빨간 풍선 같은
소녀가 있었지
아니 소년? 빨간 풍선이었던가?
너는 얼마나 멀리 날아갈까
네 몫의 어리석음으로부터
- 진은영 < 빨간 풍선 >
우리는 얼마나 멀리 날아갈까
우리 몫의 어리석음으로부터
손안에 움켜 쥔 작은 빨간 풍선 그러나 언젠가는 터지고 말 빨간 풍선..
인디언식 용어로 푸른 옥수수의 달, 말없이 거미를 바라보게 되는 달, 나뭇잎이 짙어지는 달이라는 6월
꼭 절반이 지났다. 아니 절반이 남았다.
남아있다는 말에 안도를 느껴야 할까, 조급함을 느껴야 할까.
가끔은 시간의 순환에서 벗어나 멀리 달아나고 싶다.
내 몫의 어리석음으로부터 내 몫의 욕망으로부터
내 몫의 책임과 의무로부터 내 몫의 시간과 공간으로부터./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