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반항은 언제나 옳다

여름과 태양의 남자 카뮈를 기억하는 시간.. 네 갈래 길에서 만난 고양이

나는 카뮈를 태양의 남자로 기억한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책꽂이에서 그의 책들을 꺼내 놓곤 한다.

산문집 『결혼. 여름』. 그리고 소설 『이방인』은 내가 여름의 태양을 견디는 처방전이다.

... 슬픔의 얼굴을 가진 이것이 그래도 행복이라고 불리는 것임을....

이 단순한 문장 앞에 머뭇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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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가슴으로 확신할 수 있는 진실이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그늘이 피렌체 들판의 포도나무와 올리브 나무들을 엄청나고 말없는 슬픔으로 뒤덮어가기 시작하는 어느 저녁, 나는 이 진실이 자명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고장의 슬픔은 아름다움에 대한 한갓 주석만은 아니다. 저녁을 가르며 달리는 기차 안에서 나는 내 속에서 무엇인가의 응어리가 풀려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슬픔의 얼굴을 가진 이것이 그래도 행복이라고 불리는 것임을 오늘 내가 어찌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가장 강한 혐오감을 자아내는 유물론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죽어버린 생각을 살아있는 현실이라고 믿도록 만들고자 하며 우리들 속에 내재하는 영원히 죽어 없어지게 마련인 것에 대하여 우리가 기울이는 집요하고 맑은 의식의 관심을 돌려 불모의 신화 쪽으로 쏠리게 하고자 하는 유물론이다.

피렌체 산티시마 아눈치아타이 사자(死者)들을 안치하는 수도원에 찾아갔을 때... 나는 무덤들과 봉납돌 위에 새겨진 글들을 읽어보았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 삶은 다정한 아버지요 성실한 남편... 저 사람은 가장 훌륭한 남편인 동시에 수완종은 상인. 모든 덕행의 모범이면서 프랑스말을 제나라 말처럼 했다는 어떤 여인.. 온 가족의 희망이자 땅 위이 기쁨이요 순례자... 그 어느 것도 가슴에 와닿는 것은 없었다. 돌에 새겨놓은 글을 보면 거의 모두가- 아마도 다른 의무들도 다 받아들였었으니까-죽음도 체념한 채 받아들이고 말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밤이 내렸다. 어느 기둥에 등을 기댄 채 땅바닥에 앉아있었다. 사제 한 사람이 지나가면서 미소를 보냈고 성당 안에서는 풍금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기둥에 등을 기댄 채 혼자 앉아있는 나는 마치 누구에게 목을 졸리면서도 최후의 유언처럼 자기의 믿음을 외쳐대는 사람 같은 기분이었다. 내 속에 있는 모든 것이 그 같은 체념에 의의를 제출하며 항의하고 있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 묘비명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니다.

나의 반항이 옳다. 땅 위의 순례자처럼 무심하면서도 골똘한 모습으로 가고 있는 기쁨을 뒤쫓아 나도 한 걸음 한 걸음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밖에 대해서는 나는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나는 나의 모든 힘을 다하여 아니라고 말했다. 무덤돌들은 그래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인생은‘해와 함께 떠올라 해와 함께 져가는 것col so levante col so cadente라고 나에게 일러주고 있었다. 오히려 삶이 무용하기 때문에 반항은 더욱 의미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거의 모든 시프레 나무들과 함께 봉헌된 도시를 향하여 나는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 찬란한 세계, 여인들, 그 꽃들은 수도사의 삶( 해골을 탁자에 놓아둔 수도사의 방에서 본)을 정당화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정당화는 동시에 어떤 극단적인 헐벗음은 항상 이 세계의 화려함과 풍요와 만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정당화이기도 하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려웠다. 돌기둥과 꽃들 사이에 갇혀사는 그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의 삶과 알제의 파도바니 모래사장에서 1년 동안 줄곧 햇볕을 쬐며 지내는 젊은 이드들의 삶 속에서 나는 어떤 공통된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헐벗은 채 사는 것은 보다 큰 삶(또 다른 내세의 삶이 아니라) 위한 것이다.

피에솔레에서 빨간 꽃들을 앞에 두고 사는 바로 그 사람들이 자기의 작은 방안에는 죽은 사람의 해골을 갖다 놓고 명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창문밖으로는 피렌체 시가 펼쳐 보이는가 하면 탁자 위에는 해골이 놓여 있다. 삶의 온도가 어느 정도에 도달하게 되면 영혼과 피가 한데 섞여가지고 의미에도 신앙에도 다 같이 무심

한 채 모순들 가운데서도 속 편히 살게 된다.


의식의 어느 경지에 이르면 우리는 각자의 소명에 따라, 지금까지는 절대로 이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을 달게 받아들이고 말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어떤 사막의 지도를 그려보려는 기도(企圖)라는 것... 그러나 그 이상한 사막은 자신의 목마름을 기만하지 않은 채 사막 속에서 살아갈 능력이 있는 사람들만이 아는 사막이다. 그때서야, 오직 그때서야 비로소 사막에서는 서늘한 행복의 물이 여기저기 솟아나게 될 것이다.

피렌체. 내 반항의 한가운데에는 어떤 동의가 잠자고 있음을 깨닫게 해 준 유럽의 몇 안 되는 곳. 눈물과 태양이 한데 섞인 이곳의 하늘 속에서 나는 이 땅의 뜻을 받아들이고 축제의 어두운 불꽃 속에 활활 타오르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나는 실감했다. 그러나 무슨 말을? 무슨 분별을? 사랑과 반항의 일치를 어떻게 축성하면 좋다는 말인가? 정신들이 황량하게 비워놓고 떠나버린 이 거대한 사원 속에서 나의 모든 우상들의 발은 진흙으로 되어있다.

- <사막> 부분 발췌 / 알베르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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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Albert Camus

알베르 카뮈

출생 1913년 11월 7일, 알제리

사망 1960년 1월 4일 (향년 46세)

학력 알제 대학교

경력 1941.~ 파리 수아르지 편집 담당자

수상 1957. 노벨 문학상. 프랑스의 작가, 기자,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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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는 죽기 1주 전인 1959년 12월 28일에 스승 그르니에에게 편지를 썼다. "선생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라면, 아니 그저 단순한 만족감을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저에게도 기쁨입니다." 1960년 1월 1일 그르니에가 답한다. "당신에게 이 편지를 쓰면서 새해를 시작합니다. 당신은 언제나 내게 변함없는 우정의 증표를 보여주어 나를 자꾸만 놀라게 합니다." 그르니에는 이 편지를 산문집 '섬' 개정판과 함께 부쳤지만, 카뮈는 책을 받아보지 못하고 1월 4일에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카뮈의 코트에는 전철표가 있었는데 전날 아내와 같이 전철을 타려고 했다. 그런데 갈리마르 출판사 사장의 조카이자 친구였던 미셸 갈리마르(Michel Gallimard)가 몰던 차를(갈리마르가 타라고 설득했다고) 타고 가던 길에 차가 플라타너스 나무를 들이박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냥 전철을 타고 갔다면 이런 일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카뮈는 현장에서 목이 부러져 즉사했고, 갈리마르도 며칠 뒤 병원에서 사망했다. 생전에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인터뷰에서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보다 더 의미 없는 죽음은 상상할 수 없다."란 말을 남겼다.


유작으로 다 완성하지 못한 《최초의 인간》을 남겼는데 세상을 떠날 당시 유품에 이 원고가 있었다. 그 밖에 전철표 및 지갑, 펜, 메모지 같은 것들과 같이. 미완성임에도 카뮈의 마지막 소설이라 그런지 미완성인 채로 출판되었으며, 국내에서도 정식번역되어 출판되었다.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1957년에는 역대 두 번째로 어린 43세의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실존주의자로 분류되지만, 정작 본인은 그러한 평가를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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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묘비에는 어떤 헌사가 적혀있을까?

카뮈가 피렌체 산티시마 아눈치아타이 사자(死者)들을 안치하는 수도원에 찾아갔을 때

무덤과 봉납돌 위에 새겨진 비문을 보고 그 어느 것도 가슴에 와닿는 것은 없었다고 말했다.

돌에 새겨놓은 글을 보면 거의 모두가- 아마도 다른 의무들도 다 받아들였었으니까-죽음도 체념한 채 받아들이고 말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밤이 내렸다. 기둥에 등을 기댄 채 혼자 앉아있는 나는 마치 누구에게 목을 졸리면서도 최후의 유언처럼 자기의 믿음을 외쳐대는 사람 같은 기분이었다. 내 속에 있는 모든 것이 그 같은 체념에 의의를 제출하며 항의하고 있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 묘비명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니다.

나의 반항이 옳다.


감히 나는 그의 묘비명을 이렇게 추천하고 싶다.

“나의 반항이 옳다.”
얼마나 카뮈다운 마지막인가...


나는 카뮈를 태양의 남자로 기억한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책꽂이에서 그의 책들을 꺼내 놓곤 한다.

산문집 『결혼. 여름』. 그리고 소설 『이방인』은 내가 여름의 태양을 견디는 처방전이다.

... 슬픔의 얼굴을 가진 이것이 그래도 행복이라고 불리는 것임을....

이 단순한 문장 앞에 머뭇거렸다.

슬픔의 얼굴을 가진 이것을 그래도 행복이라고 불린다니...

그러하다. 사실 그러하다

슬픔을 억누르고 살아가는데 익숙한 우리는 억압된 슬픔은 행복이라 읽히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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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고양이를 다시 만났다.

먼 거리에서 고양이의 웅크린 뒷모습을 찍었다.

네 갈래길...

고양이는 길을 고르고 있는 중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로 갈까?

아파트 정원이 모두 그의 것이라 하더라도....

멀리서 찍힌 고양이는 풍경 속에 상대적으로 작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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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가슴으로 확신하게 한다.

살아있음을.

여전히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그래서 안도한다.

비록 슬픔의 얼굴을 가진 어떤 것들을 그래도 행복이라 불러야 한다고 해도

오늘 나는 행복하다.

끝없이 사랑할 수 있으니...

이 시간을. 카뮈를. 실존과 부조리를........ 전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여린 마음들을,..

도시의 잠 못 드는 불빛 아래 같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는 수많은 이들과 더불어 살고 있음에...

‘나의 반항은 옳다’

올여름을 견디기 위한 가장 카뮈다운 말을 다시 중얼거려 본다.

나의 반항도 옳은 것이기를........ /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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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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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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