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틈에서 빠져나온 것들, 침묵의 체에서 걸러진 것들. 막스피카르트
봄은 겨울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봄은 침묵으로부터 온다. 또한 그 침묵으로부터 겨울이 그리고 여름과 가을이 온다.
봄의 어느 아침, 꽃들을 가득 달고 벚나무가 서 있다. 하얀 꽃들은 그 가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침묵의 체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그 꽃들은 침묵을 따라서 미끄러져 내려왔고 그래서 하얀빛이 되었다.
나무의 푸른빛 또한 돌연히 나타난다. 한 나무가 다른 한 나무 곁에 푸른빛으로 서 있는 모습은 그 푸른빛이 침묵하면서 한 나무에게서 다른 한 나무에게로 옮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대화할 때 말이 한 사람에게서 다른 한 사람에게로 전해지듯이.
그렇게 돌연히 봄이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먼 곳을 응시한다. 말없이 봄을 가져다 둔 뒤에 사라져 버린 그 사람이 아직도 거기에 보이는 듯이 봄에는 사람들이 눈은 먼 곳을 응시한다 봄의 사물들은 몹시도 연해서 큰 소리를 내며 시간의 단단한 벽을 부수고 나올 필요가 없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봄의 사물들은 시간의 갈라진 틈으로 스며 나와 돌연히 거기에 나타난다.
광장의 아이들이 가장 먼저 그 시간의 틈으로 빠져나온다. 공중에는 공, 땅바닥에는 유리구슬들과 함께 꽃보다도 아이들이 먼저 나타났다. 돌연히 아이들은 거기 있었다. 자기들의 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봄과 함께 시간의 틈에서 빠져나온 듯, 맨 먼저 도착한 아이들은 하늘 높이 공을 던지고 커다랗게 소리친다. 마치 뒤따라오는 봄의 사물들에게 길을 가르쳐주려는 듯이.
봄의 그 소리들 뒤편에는 시간의 침묵이 있다. 그 침묵은 하나의 벽이다. 아이들의 말은 그 벽에 맞아 튕겨 나온다. 마치 공이 집 벽에 맞아 튕겨 나오듯이.
나무의 꽃들은 아주 가볍게 만들어져서 마치 침묵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침묵 위에 가만히 내려앉으려고 하는 것 같다. 옮아가는 계절의 순환 속에서 침묵에 실려 다음 봄으로 가기 위해서, 마치 새들이 더 멀리 실려가기 위해서 배 위에 내려앉듯이 -막스 피카르트 <시간과 침묵> 부분
.... 이 책에 대해서는 논평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직접 읽어주시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막스 피카르트는 고뇌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고뇌의 특징은 그것이 무서울 만큼 엄밀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막스 피카르트를 가리켜 고뇌하는 사람이라 칭한다.
무서울 정도 엄밀한 고뇌를 지닌 남자의 글을 읽는다.
글은 아름다우면서 단정하다.
하얀 꽃들은 그 가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침묵의 체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그 꽃들은 침묵을 따라서 미끄러져 내려왔고 그래서 하얀빛이 되었다.
침묵의 체에서 떨어져 나온 꽃들이 필 차례다.
시간이 틈으로 빠져나온 들판의 아이들이 있다
외친다, 봄에게 길을 안내라도 하려는 듯.... 달린다. 하늘과 나무가 아이들의 뒤를 따른다.
떠들썩한 소리 ( Skylarking) 1881/ 에리크 베렌스키올드 erik werenskiold/노르웨이 화가, 일러스트
시간의 틈에서 돌연히 빠져나온 아이들을 보며 누구에게나 있었던 ‘유년’이라는 이름의 공간을 그리워한다, 유년은 시간적 의미지만 내게 유년은 하나의 공간이다. 알 수 없는 무언가로 가득 찬 공간.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지만 다가오는 실체를 알 고 싶지 않은 공간, 발랄한 외침과 달뜬 유희
봄은 겨울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봄은 침묵으로부터 온 것도 아니고 봄은 아이들로부터 온다.
가방을 메고 학원을 전전하는 요즘 아이들이 아니고
오래전 환호성을 지르며 들판을 달리던 흙의 아이들에게서 온다.
이미 가슴속 흙이 사라진 우리는.... 더 이상 흙처럼 살지 못한다.
벨에포크.. 저마다 가장 아름다운 시절로 기억되는 순간을 생각한다.
봄이 오고 있다.
오랜 시간 뒤 지금 이 순간을 나만의 벨에포크로 기억할 수 있게
시간의 틈에서 돌연히 빠져나와서 메마른 가슴을 흙내음으로 채우는 일,
봄의 연초록 향기로 채우는 일..../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