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되는 현재와 의미를 향해 열린 텅빈 공간에서의 추방

로브그리예 『질투』 La Jalousie

세계는 의미 있는 것도 부조리한 것도 아니다. 세계는 단지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세계의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다. - 로브그리예


로브그리예 『질투』 La Jalou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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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로브그리예는 1922년 프랑스 브레스트에서 태어나, 국립농업기술학교를 졸업하고 국립통계경제연구소에서 일하는 틈틈이 습작했다. 식민지 감귤류 및 과일 연구소 근무로 서인도제도 등지에 체류하다가 프랑스로 돌아오는 배에서 『고무지우개』를 쓰기 시작해 1953년에 출간했다. ‘누보로망’의 출발점으로 평가받는 이 소설은 1954년 페네옹상을 수상했고 롤랑 바르트를 비롯한 평론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전업 작가가 된 그는 1955년 『엿보는 자』로 파란을 일으키며 그해 비평가상을 받았고, 『질투』와 『미궁 속으로』로 점차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누보로망의 대표작가 로브그리예의 문학적 실험이 돋보이는 작품. 전통적 사실주의 문학에 도전장을 던지며, 소설의 관습적인 기법을 뒤엎은 새로운 문학세계와 만날 수 있다. 사건, 인물, 배경에 대한 묘사는 거의 없이, 아내를 관찰하는 한 남자의 고통스러운 시선만을 집요하게 뒤쫓는 소설,

한 남자의 시선으로 구축된 세계. 한 남자가 보고 듣고 겪은 것, 그리고 그것을 되새기고 의심하다가 마침내는 자신의 상상력에 의해 조금씩 변형시켜 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프랑스 식민지로 보이는 아프리카 한 지역에 바나나 농장을 경영하는 화자와 그의 아내 A... 가 살고 있다. 이웃에는 사는 프랑크는 종종 화자의 집에 놀러 와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며 A... 와 이야기를 나눈다. 화자인 남편은 의심의 눈초리로 둘을 지켜보는데...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는 남편의 자폐적인 중얼거림과 고통스러운 관찰의 기록이 이 책의 전부이다.

이 소설의 서술자는 자신의 존재를 ‘나’ 혹은 ‘그’로 언급하지 않는다. 눈에 비친 사물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낸다. 마치 카메라가 카메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이지 않지만 카메라에 비친 사물을 통해 존재와 위치를 알 수 있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알랭 로브그리예의 작품에서 인물은 불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보기 때문에 존재한다.

질투에 찬 남편의 목소리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대신 치밀하고 정교한 묘사로 독자가 질투의 강도를 느낄 수 있다.

테라스에 앉아있는 A와 프랑크 손가락 사이의 거리, 테라스 위에 남아있는 A.. 프랑크가 앉았던 의자의 다리 자국들의 위치와 거리.... 경이로우며 잔혹하다.



사물 세계를 뚫고 나오는 한 줄기 의심의 시선

작가의 시선은 집요할 정도로 사물의 표면에만 머문다.

작가는 비교하거나 판단하는 법이 없으며, 상징 혹은 은유를 쓰는 법이 없다. 작가의 시선은 그저 인간을 둘러싼 사물 세계가 얼마나 견고하게 존재하고 있는 지를 확인할 뿐이다, 인간은 헛되이 사물에 끊임없이 심리적, 도덕적, 형이상학 의미들을 부여해 왔다. 그러나 인간적인 의미가 착색되면 사물은 본연의 성질을 잃고 인간 세계의 부수적 존재로 전락할 뿐이다. 로브그리예는 그런 오류를 철저히 배격한다

“세계는 의미 있는 것도 부조리한 것도 아니다. 세계는 단지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세계의 가장 주목할만한 점이다.”

견고한 사물의 세계, 방어벽을 뚫고 끝내 표출되고 마는 의심의 시선, 그 공고함을 뚫고 비어져 나오는 불안의 징후, 고통받는 한 인간의 마음, 어쩔 도리 없이 확고부동한 사물의 세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의 세계에서 고통받는 무력한 인간을 그려내는 것


프랑스 식민지 중 한 곳에 위치한 열대 바나나 농장을 배경으로 한다. 집의 형태. 테라스 기둥 그림자가 이루는 각도, 맞은편 바나나 나무의 정렬 상태 등 주위 풍경을 지나치리만큼 꼼꼼하게 묘사한다. 이 작품의 화자는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의 존재는 식탁에 마련된 사인분의 식기, 테라스에 놓인 네 개의 의자 등과 같이 물화된 단서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의 관찰 속에 아내 A가 있다. 그는 A가 등을 돌리고 편지를 읽는 장면을 보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모습도 관찰한다. 이웃집 남자 프랑크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프랑크에게서 빌린 책을 읽고 질투심 많은 남편에 대해, 또 여주인공의 부정한 행실에 대해 암시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을 지켜본다. 이들을 지켜보는 화자의 자리는 그들을 감시하기 불편하게 멀찍이 떨어져 있다. 이런 자리 배치는 A의 생각이었다. 모기를 끌어들인다며 테라스의 램프로 치우게 했다. 테라스는 사물의 희미한 윤곽만 겨우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어둠에 잠긴다.


여러 번 반복해서 등장하며 끊임없이 변형되는 ‘지네’ 장면에는 금방이라도 분출할 듯한 에너지와 관능의 상징이다. 식사 도중 벽에 나타난 지네를 보고 A가 신음처럼 외마다 소리를 뱉는다. 그러자 프랭크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냅킨을 말아 쥐고 지네를 힘차게 내리쳐 죽인다. 이어 하얀 식탁보를 움켜쥐고 경련하는 A의 손이 클로즈업된다. 그 손은 뒤에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침대보를 잡고 경련하는 것으로 변형되고 프랑크는 냅킨이 아니라 침실 수건으로 지네를 죽이는 것으로 그려진다. 두 장면 사이에 시내에 함께 갔던 A와 프랑크가 예기치 않은 자동차 고장으로 하룻밤 묵고 오는 사건이 자리 잡는다.


시내에서 돌아온 A는 평소보다 수다스럽고 상냥하다. 시내에서의 일에 대해선 늘 그렇고 그런 얘기라며 언급을 피한다. 아내가 집을 비운 사이 화자는 고무지우개와 면도칼을 가지고 아내가 부정한 흔적들을 지우러 다닌다. 식당 벽 위 프랑크의 손에 으깨졌던 지네의 흔적을 지우고, 파란색 편지지 위에 남아있는 아내의 필체를 지운다. 아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테라스에 앉아있는 화자의 주위로 난간의 세로 살과 마루 위에 길게 난 흠들, 벽의 나무판자의 흠이 긴 그림자를 이루며 마치 하나의 감옥인 양 화자를 옥죈다. 질투라는 감정에 스스로 매몰된 화자.


눈 : 세계와 의식 사이의 교전지

. 어떤 이들은 카메라의 객관성을 문학 작품 속에 빌려왔다고 하여 로브그리예의 문학을 '객관적 문학'이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카메라가 결코 객관적이지 않듯, 시선도 객관적이지 않다. 오히려 시선은 인간의 오감 가운데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시선이야말로 인간의 욕망에 철저하게 종속된 감각이다. 여기서 불어 단어 objective는 '객관적인'과 '대물렌즈'라는 두 가지 뜻 사이에서 미묘한 역설을 드러낸다.

로브그리예는

“ 영화에서 누보로망 작가들을 열광시키는 것은 카메라의 객관성이 아니다. 그것은 전혀 객관적이지 않은 것, 꿈이나 기억에 다름 아닌, 한 마디로 상상에 지나지 않는 것을 명백한 객관의 외형으로 제시할 수 있는 카메라의 가능성이다.... 한편 비록 사람들이(내 소설에서) 과학적이고 상세하게 묘사된 많은 사물을 발견하게 될 경우에도 거기에는 언제나 그리고 우선적으로 그 사물을 보고 있는 ‘시선’이 있다.”라고 말한다.

시선은 인간의 오감 가운데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시선이야말로 인간의 욕망에 철저하게 종속된 감각이다. 맞는 말이다

인간의 시선처럼 즉흥적이고 왜곡되기 쉽고 때로 굴종적이고 편파적이고 권위적인 것이 또 있을까.

보는 이의 프레임에 갇힌 현상

사람들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어버리지 않는가?

설령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해도.... 세상을 향해 열린 눈을 맹신한다.


P67

극히 짧은 음절의 말소리는 그 사이를 점점 길게 메우는 어둠 때문에 마침내는 끊어져버리고, 두 사람은 완전히 밤에 섞여 들고 만다. 어둠 속에서 색이 바랜 셔츠와 드레스의 흐릿한 형채로만 두 사람의 존재가 드러난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상체를 등받이에 기대고 두 팔은 팔걸이 위헤 얹고 있다. 팔걸이 주위에 이따금 두 사람의 불분명한 움직임이 일어난다. 아주 작은 폭의 움직임이어서, 시작했는가 하면 어느새 원래 상태로 돌아가 있다. 어쩌면 상상일지도 모른다.


내 눈앞에서 (내가 질투에 찬 사람이라는 전제하에) 관찰되는 현재에 예민해진다.

앞에 앉은 두 사람의 행동. 아무렇지 않은 손동작과 웃음. 무미건조한 대화마저도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것처럼 혹은 어떤 단서를 암시하는 것처럼 판단한다. 다만 그것을 작품 속 화자는 객관적인 사물처럼 표현한다.


시간 : 항구적으로 지속되는 현재

질투에 빠진 남편이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는 것들, 그가 겪고 괴로워하고 관찰하고 떠올린 사건들은 그가 경험한 내적 시간에 따라 총체적인 경험을 구성한다.

이 작품에서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지표는 해의 높낮이, 기둥의 그림자 길이와 각도, 시냇물 위의 통나무 다리를 수리하는 인부들의 우치와 작업 진행 상황, 농장에 심은 바나나 나무의 수확 상태 같은 것이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지금’ 은 구체적으로 언제를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화자의 경험세계에 비춰서만 유의미한 시간이다.


“지금 막 A…는 중앙 복도와 연결된 안쪽 문을 통해 방에 들어왔다. 그녀는 창문 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는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다. 아마 그녀는 문에 들어서면서부터 창 너머 테라스 이편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첫 문장

지금 기둥의 그림자는 기둥 밑에 맞닿은 테라스의 동위각을 정확히 반분하고 있다.’

이 작품의 끝 부분

골짜기 안쪽은 급속도로 빛을 잃는다. 골짜기 사면의 바나나 나무 잎사귀가 황혼 녘에 차츰 희미해진다. 6시 30분이다. 칠흑 같은 어둠과 귀가 따갑게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가 지금 정원과 테라스와 집 주위 사방으로 다시 한번 퍼진다.


‘지금’이라는 시점은. 존재하는 기간이 매우 짧다.

지금이라는 단어를 발화하는 순간 지금은 사라지고 또 지금은 생겨난다

로브그리예는 시간이란 곧 ‘지금’의 영속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인가?

물리적 시간으로서 ‘지금’보다 심리적 시간으로서의 ‘지금’은 매우 고통스러운 순간이다.

고통을 관찰하는 시간, 아무 일 없는 평온 속에 아무 일 있음을 집요하게 확인하는 시간이다.



공간 : 모든 의미를 향해 열려 있는 텅 빈 공간

로브그리예의 공간이 빚어내는 역설을 롤랑바르트는

“ 로브그리예는 각종 지리적 개념들을 마음껏 쓰면서 단일하고 통일된 고전적 공간을 조롱하고 있다. 그의 묘사는 세계이 실체가 고착되는 것을 막고 아울러 그 실체를 공간의 압력 아래 증발시켜 버린다... 세계의 실체를 각종 선과 방향 속에 익사시키고 있다. 왼쪽, 오른쪽 등의 고전적 명칭을 남용함으로써 전통적인 공간을 분열시켜, 완전히 새로운 공간, 시간적 깊이를 갖춘 미증유의 공간을 창조하고 있다.”

인과적 의미가 침범할 수 없는 텅 빈 공간과 무한히 순환하는 ‘지금, 여기’의 세계, 필연적으로 수많은 의미를 불러들인다.


P. 51 구석의 창문은 활짝은 아니지만 양쪽 날개가 다 열려 있다. 오른쪽 날개는 겨우 살짝 열려 있기 때문에 아직도 창틀의 반을 가리고 있다. 반대로 왼쪽 날개는 벽 쪽으로 활짝 젖혀 있다. 그러나 옆의 창틀과 직각을 이루지 않는 것으로 봐서 왼쪽 날개도 끝까지 젖힌 것은 아니다. 이렇게 해서 창문의 공간은 높이가 같고 폭이 비슷한 세 개의 면으로 나뉜다. 가운데 면은 열린 공간이고 양쪽 옆은 세 개씩의 판유리로 이루어진 유리창이다. 각각의 면은 하나의 풍경, 즉 자갈이 깔린 안뜰과 무성한 바나나 나무 잎사귀를 일부분씩 담고 있다.


독자인 우리는 로브그리예의 테라스에 초대받는다.

함께 앉아 (엄밀히 말하면 로브그리예의 바로 옆 자리에 앉아) 맞은 편의 두 사람, 프랑크와 A를 관찰한다.

두 사람의 어깨 높이, A의 머리카락의 흔들림, 의자 팔걸이에 스치는 순간의 동작

잔이 채워지는 소리, 모기를 끌어들이니 램프를 꺼달라고 한 A의 속내를 탐색한다.

참 기묘하다. 화자의 상상과 현실이 뒤엉킨다,

벽을 타고 내려오는 지네와 지네의 죽음과 지네가 남긴 흔적과 흉터처럼 남은 흔적을 지우려는 화자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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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 드 라 프레네의 작품 < 앉아 있는 남자 > 1913년

잘 차려입은 남자가 앉아있다. 정물처럼

큐비즘의 일종, 남자는 조각조각 맞추어져 있다.

남자의 얼굴, 분할된 얼굴, 표정을 알 수 없다. 남자를 관찰하고 남자는 나를 관찰한다.

질투의 감정이란 극도로 사랑한다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집요한 관찰은 결핍된 사랑에 대한 다른 방식의 표현이 아닐까.


<사랑받으려고 하지 말라>


사랑받으려고 하지 말라

자발적인 추방자가 되라

너의 인생의 모순들을

숄처럼 몸에 두르라

날아오는 돌들을 막고

너를 따뜻하게 하기 위해

...

추방자가 되라

초라해 보여도

혼자 걷는 것을 기뻐하라

....

사랑받으려고 하지 말라.

추방자가 되라....

앨리스 워커


<제3의 몸>

/ 로버트 블라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가까이 앉아 있다

두 사람은 이 순간

더 나이 들었기를, 더 젊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른 나라,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태어났기를’

바라지 않는다,

지금 있는 그곳에

말하는 것 혹은 말하지 않는 것에 만족한다.

...

남자는 자신이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본다

그리고 자신에게 책을 건네는 여자의 손을 본다

그들은 자신들이 공유하는 제3의 몸에 복종한다

그들은 그 몸을 사랑하기로 약속했다

늙음이 오고 이별이 오고 죽음이 올 것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가까이 앉아있다

........

프랑크와 A를 떠올리며 시를 읽는다. 두사람은 어쩌면 두 사람을 관찰하는 화자(남편)를 관찰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서로가 서로에게 관찰당하고 관찰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모두에게 공평한 늙음이 오고 이별이 오고 죽음이 올 것이다

그토록 집요하게 반복되는 ‘지금’이라는 단어가 부재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고집스럽게 불경한 지네의 흔적을 지우려 하지 않아도

흔적은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다.


세계는 의미 있는 것도 부조리한 것도 아니다. 세계는 단지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세계의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다. - 로브그리예

존재하는 세계에 살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하다면 소설 속 화자(남편)의 집요한 관찰은 존재하는 세계에 살고 있음을 확인하려는 광적인 자기 확인 같은 것이 아닐까.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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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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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아르코 문학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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