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G_129에서 경험한 자연농법과 시골 생활은 정말 특별했다. 낭만에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들깨대를 작두로 자르고 있다. 이렇게 자르고 나서는 밭두둑에 덮어주었다.
GG_129에서는 모든 농사일을 기계 없이 두 손 , 두 발, 낫과 간단한 도구로만 했다.(담벼락 제초작업만 빼고) GG_129에 오기 이전의 우프를 통해 농사일에 있어서 기계의 중요성을 절실히 배웠었다. 기계 없이 농사를 짓는 GG_129는 다른 농장에 비해 당연히 규모가 작았고, 규모가 작다는 것은 농가 경영에 있어서 분명히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그런 중요한 문제를 잠시 무시해두고 싶을 정도로 두 손 , 두 발, 간단한 도구로만 농사를 지을 때의 감각은 너무 좋았다. '농가의 경영 문제를 무시할 수 있는 우퍼의 입장'이라는 현실적인, 반 낭만적인 문제가 떠올랐지만 이 역시도 무시하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몸으로 하는 농사일의 속도는 엄청 느렸다. 하지만 빠르게 일을 끝내는 것과는 다른 뿌듯함이 있었다.
농사, 먹거리에 관심을 갖게 된 첫 계기는 어느 날 갈비찜을 왕창 먹다가 문득 떠올라버린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고기를 먹어도 되는 걸까..?'라는 의문이었다. 이후로도 이 의문은 '이렇게 에어컨을..?, 이렇게 자동차를..? 이렇게 플라스틱을..?'라는 식으로 다양하게 떠올랐다. (내가 특별히 예민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생각들이 떠오를 때에 잠깐 불편하긴 했지만, 내 행동양식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었다.)
어쨌든 이런 의문이 근본적으로 문제시하고 있는 것은 '나'라는 하는 한 인간이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있고, 이로써 지구 환경과 생명체에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는 너무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몸으로 하는 농사는 이 지점에서 아주 뿌듯했다.
정말 뿌듯하고 정말 느린 작업이었다.
나의 몸뚱이로 인한 영향력은 기계를 활용했을 때에 비해 아주 작았지만, 작기에 좋았다. 개미가 굴을 파듯이, 곰이 나무를 쓰러트리듯이, 새는 새똥을 싸고 코끼리는 코끼리 똥을 싸듯이 지구 상의 다른 생명체들과 다를 바 없이 한 유기체에게 주어진 정도의 힘만을 활용한다는 것, 영향력만을 끼친다는 감각이 좋았다.
GG_129에서 경험한 농사의 또 다른 특징은 몸뚱이와 낫으로 베어낸 잡초를 그냥 버리지 않고 작물 사이사이의 빈 공간을 채워주는데 활용하는 풀 멀칭이었다.
기계와 마찬가지로 실제 농사를 접하고서야 비닐 멀칭의 가치를 알게 되긴 했었다. 그렇지만 GG_129에서 경험한 풀 멀칭은 비닐멀칭보다 훨씬 예뻤고, 기뻤다.
좋다고 웃고 있다.
GG_129에서의 풀 멀칭은 단순히 비닐을 쓰지 않는 이상의 특별함이 있었다. 비록 우리에게 필요하지는 않지만 그 나름의 생명력을 갖고 지구에 태어난 잡초를 그저 베어버리고 버리기보다는 멀칭이라는 형태를 통해 작물의 성장 과정을 함께함으로써 다른 모습으로 생명을 이어간다는 의미가 있었다.
이 지점에서 나는 완전히 낭만에 취해버렸다. 땅과 풀, 그다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내 주변의 많은 것들과 이렇게까지 깊게 관계를 맺는 일에는,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참 굉장한 충만함이 있었다.
낭만농법 설정샷
나는 내가 취해있는 것을 알았다. 호스트님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는 지금 자연농법이 아니라 낭만 농법을 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낭만을 전과 같이 밀어내지 않았다. 작물들한테 말을 걸기도 하고.. 그저 지켜보기도 하고.. 그림을 그려보기도 하고.. 그랬다. 그냥 흠뻑 빠져들어갔다.
GG_129에서는 일상생활도 낭만적이었다. 지내는 동안 거실에 있는 큰 테이블에서 밀크티를 많이 마셨다. 개인의 취향에 맞추어 다양한 밀크티를 만들어낼 수 있었는데, 그 사소한 선택들이 좋았다. 작은 선택들인데, 작아서 좋았다.
그렇게 밀크티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많이 했다. 얘기라고 해봤자 나의 푸념들이 많았지만, GG_129의 호스트님 부부들은 나의 푸념들을 참 매끄럽게 잘 받으시는 분들이었다. 푸념을 푸념에서 끝나게 하지 않고 대화의 장작으로 잘 쓰신달까! 즐겁고 감사한 대화였다.
거실에는 서쪽으로 큰 창이 나있었다. 창이 아주 커서 시원한 맛이 있고, 날이 좋을 때에는 저 멀리 용문산이 보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렇게 또 특별한 창은 아니기도 했다. 하지만 이 창의 진가는 오후에 발휘되었는데, 서쪽으로 나있다 보니 노을이 아주 잘 보였다. 사실 가끔은 레이저같이 부담스럽게 비추어지기도 했다. 불편하지만 인상적인 창이었다.
GG_129에 와서야 밀크티를 처음 제대로 먹었었는데, 엄청 좋아하게 돼버렸었다. 그래서 반농반진으로, 앞으로도 계속 우프 생활할 건데 이렇게 밀크티 같은 거 맛 들여놓으시면 어떡하냐고, 책임지셔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실상 GG_129를 나온 이후로는 밀크티 생각이 전혀 안 났다. 그 분위기 속에서의 밀크티가 좋은 것이었다.그 때에는 하루 하루 홍차를 어떻게 블렌딩할지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는데 지금은 무어가 들어갔었는지 다 까먹어버렸다.
익숙한 메뉴들도 새로운 맛으로 맛있었고 처음 먹어보는 메뉴들도 엄청 맛있었다. 마우동, 오버나잇오트밀,,,,
맛있고 새롭고 아기자기한 음식들도 참 좋았다. 사실 한 번은 내가 너무 맛있어서 너무 많이 먹어버렸었다. 서로 약간은 당황했었는데, 그 상황이 참 웃겼다. 집 안의 모습들도 정갈하니 좋았다. 다양한 작물들로 이루어진 밭의 풍경도 당연히 이뻤다.
이런 표현은 조심스럽지만, 호스트님 부부는 귀여운 분들이었다. 우프에 경험한 모든 것들이 표현하기 어렵지만, 이 묘한 귀여움은 그냥 표현이 불가능하다. 경험해보는 수밖에..( '우리가 농부로 살 수 있을까'라는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다.)
my 장화를 사서 또 기분이 좋았다. 이 날 북한강변을 따라 자전거를 탔었는데 이게 또 굉장했다.
GG_129에서의 우핑은 한 마디로 모든 게 너무 좋았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막연히 희망해온 귀농귀촌에 가까웠다. 낭만에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흠뻑 즐겼다. 그렇지만 이러한 만끽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고민을 낳았다. 너무 좋은데, 정말 완벽에 가까운데, 뭔가 아쉬웠다.
문제는 이 곳에서 뭔가가 더해지길 바라는 아쉬움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완전히 다른 것을 바라는 아쉬움이었다. 느리고 작은 것에는 분명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한 유기체로서의 깊은 충만감이 있었다. 있었지만, 심심했다. 목이 마른 것 같은 감각이었다. 뭔가 빠르고 자극적인 게 땡겼다.
이런 내 모습은 참 이색적이었다. 평소에도 환경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잘 실천을 하지 않는 내 모습에 적지 않게 자조를 해왔지만 이런 곳까지 와서 아쉬운 소리나 하고 있다니? 거 참. 실망이라고도 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이었다.
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환경, 먹거리에 대한 마음이 그다지 절실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진지하게 들었다. 물론 이제까지 살아온 방식이 있으니 관성의 문제일 수도 있었다. 이유야 어쨌든 간에 확실히 내 반응에는 문제가 있었다. 균열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