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로잡은 그 해 여름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완전하게 엘리오의 그 해 여름에 마음을 빼앗겼다. 수채화처럼 맑고 투명한, 찬란한 감정이 황홀하게 일렁이며 온몸의 감각을 일깨웠다. 깊은 동면에 빠져있던 내면의 무언가가 마침내 고요한 정적을 깨고 나를 사로잡은 기분이었다. 나는 엘리오와 올리버 각각의 시선에 서서,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을 쫓아다니며 그들이 되는 경험을 했다. 수줍은 감정에 설렘과 탄식이 교차하며 마음이 점차 달아올랐다. 왜 그들은 서로를 진작에 알아보지 못한 거야.
정말이지 이런 경험은 오랜만이었다. 나는 영화 속 수많은 이야기에 공감을 하면서도 그들이 되는 것보다 거리를 두는 것이 편했다. 영화 속 인물에 깊이 동화되는 것은 어쩐지 부끄러웠다. 그것도 아련한 감정을 마구 소환하는 멜로를 보면서 경계가 무뎌지는 것은 나답지 않았다. 그런데 이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공감과 비판적인 잣대로 영화를 보는 나를 속절없이 무너뜨렸다. 나는 곧 엘리오가 되고, 올리버가 됐다. 두 사람이 감정을 꾹 억누른 채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는 찰나의 순간에 압도되며, 엇갈리는 감정이 어서 마주 보는 순간이 오기를 염원했다.
서로를 향한 마음이 한 발짝 좁혀오면, 어렵게 전진한 마음은 순식간에 두세 걸음 물러났다. 엘리오는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올리버의 매력에 마음을 빼앗겼고, 올리버는 유약함과 무심함이 공존하는 엘리오의 이중적인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서로를 강하게 열망하면서도 지레짐작으로 마음을 오해하며, 짧다면 짧은 6주간의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했다. 마음을 오해하고 억누르는 그 무수한 순간들이 안타까움과 함께 장면 장면 뇌리에 박혔다.
돌아보면, 엘리오와 올리버가 그랬듯, 떨림으로 가득한 시절이 있었다. 상대방이 나를 봐주기를, 나와 같기를, 함께 할 수 있기를 원했던 그 시절. 지금은 목표가 뚜렷한 일상에 파묻혀 다른 감정을 가질 여력이 사그라들었지만, 순수한 열망이 지배했던 그때의 일상은 지금과 다른 생기로 가득했다. 어쩌면 바쁘다는 핑계로 감정을 억누르고 재단하느라 순수함으로 오감을 자극하는 이 영화에 격하게 몰입하는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에게 찾아온 열병 같은 사랑을 감정의 교류에 머무르지 않고, 세심한 연출로 담아낸 욕망의 순간에도 마음이 사로잡혔다.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빠진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다가서는 순간을 매우 조심스럽게 담아냈다. 풀밭에서의 수줍은 도발을 지나 마침내 마음을 확인한 후, 침대에 걸터앉아 서로의 발을 만지작거리는 장면에서 그동안 참아왔던 간절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밀당을 오가며 쌓아온 애달픈 마음은 노골적인 장면 없이도 떨림의 순간을 감정적으로 전이하는 마법을 펼쳐졌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언뜻 보면 달콤 쌉싸름한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엘리오의 이야기이면서, 한편으로는 전부가 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비운의 남자 올리버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올리버가 처음 엘리오의 집에 도착한 날, 단정한 차림새가 주는 그의 첫인상은 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라온 미국 청년의 이미지였다. 영화 초반, 올리버의 컨버스 운동화를 몇 차례 클로즈업하는데, 자유로운 분위기를 쉽게 알 수 있는 엘리오와 달리,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올리버가 겪을 내적 갈등을 짐작하게 했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올리버에게 더 마음이 쓰였다. 그가 논문에 쓸 문구 때문에 고민하던 오후, 엘리오의 친절한 조언을 듣고 올리버가 했던 행동을 떠올려 본다면, 그때 그가 얼마나 벅찬 감정이었는지 알 수 있다. 올리버는 엘리오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사로잡혀 있었다. 덧붙여, 올리버가 뒤를 돌아보는 장면이 몇 차례 반복되는데 운명을 예감하는듯한 모습처럼 다가왔다.
낭만적인 정취가 물씬 나는 영상미도 좋았지만, 섬세하게 요동치는 심리를 포착한 음악은 매혹 그 자체였다. 황홀한 귀르가즘이 두 사람의 심리에 바짝 다가서게 했고, 매 순간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게 단단히 붙잡아뒀다. 음악을 먼저 찾아 듣지 않는 요즘, 영화 속 음악은 그들의 이야기만큼이나 아름답고,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흐드러지게 녹는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다시 꺼내봐야 할 시간이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