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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도루묵

비우기 위해 터뜨리다

눈오는 밤, 그저 생각나는 건 정종이나 소주다. 안주는 너무 화려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뻔하고 뻔한 노래가 나오는 것 보다는 차라리 음악이 없는 편이 낫다. 미닫이 문을 스윽 열고 들어가면 김서린 안경 너머로 취한 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섞여 들어 마음이 푸근해질 것이다.


서울의 술꾼들이 사랑하는 맛집들은 주로 을지로에 있다. 창업 삼십년은 기본으로 넘어가는 나름의 노포들이 즐비하다. 그 이상의 나이를 먹은 5층 내외의 건물들이 이웃하고 마주하여 거리를 이룬다. 그 조경은 서울에서 나고 자란 이에게 고향의 풍경 비슷한 것이다. 서울의 중심부에 있으나 인근의 종로보다 지난 세기 서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긴 거리에 걸쳐 땀을 흘리고 힘을 쓰는 이들이 낮을 채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쇳밥과 인쇄밥 등으로 밥벌이를 책임지는 사나이들의 거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을지로의 낮은 그래서 숭고한 생산의 시간이요, 밤은 고된 육체를 달래는 해소의 시간이다.


비록 육체 노동과는 거리가 먼 일을 하고 있지만 나이를 먹을 수록 그런 옛동네들이 좋아진다.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되고 예의 바른 서비스에 민감해하지 않아도 된다. 맛있는 음식과 푸근한 분위기, 적절한 가격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원래 몸쓰는 사람들이 주 고객인 가게치고 맛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게 나의 지론이기도 하다. 처음 들어갔는데 머리 희끗희끗한 노인들이 몇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으면 승률은 더욱 높아진다.


수육이나 양무침, 김치찌개도 좋다. 막 썬 회와 가격과 정비례하는 선도의 해물도 좋다. 철공소의 기계들이 수면에 들어간 후 몰려든 넥타이 부대를 병풍처럼 두르고 일차를 한다. 넥타이 맨 이들의 정제된 언어에 취기가 섞여 분무기처럼 뿌려지면 맥주 오백씨씨에 노가리나 골뱅이 따위를 곁들여 이차를 한다. 다음 날을 걱정하는 이들이 택시 안으로, 지하철 역으로 사라지면 남는 건 두 셋이 고작. 행여 모두가 마음이 통하면 최선이고 싫지 않은 사람들로만 짜여도 차선은 된다. 다소의 감정은 이미 투명하거나 노르스름한 알콜이 덮은 후다. 나는 외친다. 


“야, 우리 도루묵에 소주 각 일병씩만 딱 하고 헤어지자!”


을지로 3가 골뱅이골목 초입에 있는 을지오뎅.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오뎅탕 전문으로 시작한 가게지만 술꾼들의 주타겟은 도루묵이다. 가을의 끝자락과 겨울의 입구에서 뱃속을 알로 꽉 채우는 도루묵을 일년 내내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알없는 도루묵이란 푸들 머리없는 엘에이 메탈아닌가. 구이도 찌개도 수준급이다. 2인석? 4인석? 그런 거 없다. 커다란 ‘스뎅’ 오뎅가게용 테이블 하나에 스무명 남짓 둘러 앉으면 가게가 꽉찬다. 오뎅바의 유행은 사라졌지만 유행의 상징은 유물이 되어 팔십년대 미싱 다이처럼 훌륭한 인테리어로 살아 남았다.


지난 여름 꽤 오래 알고 지낸 친구를 오랫만에 만났다. 김치 찌개에 삼겹살로 일차를 하고 어딜 갈까 고심하던 중 그 친구가 이끌었다. 골뱅이 골목을 그렇게 자주 왔으면서 왜 이런 곳을 몰랐는지. 감탄했다. 이 감탄에 대한 선물로 나는 그 친구와 함께 삼차로 신세계에 갔다. 서로를 경탄시켜준 밤이었다. 그 후 계절이 두번 바뀌는 동안 을지 오뎅을 다섯 번 갔다. 단골의 기준이야 사람마다 다르고 가게마다 다른 법이라지만 왠만해선 홍대를 벗어나지 않는 내가 다섯 번 갔으면 나름 단골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섯 번 모두 다른 사람들과 갔다. 둘 아니면 셋이었다. 넷 이상 간 적은 없다. 늘 나란히 앉아 소주 한 병을 시킨다. 덥힌 백화수복 한 컵을 시켜도 좋다.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도루묵 알을 씹으며 전작에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눈다. 보통은 하나 마나한 얘기다. 이 공간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하나 마나한 얘기를 한다. 결국은 왈짜들의 말이 된다. 괜찮다. 이런 비밀스러운 공간의 이야기란 잔의 무게를 덜고 도루묵의 배를 비우기 위한 연료니까. 겨울의 작당모의란 내일의 해와 함께 빛속으로 사라지기 마련이니까. 송년회의 시즌이 왔다. 을지로에서 약속이 잡히면 그 날의 마침표는 도루묵의 알이 될 것이다. 올 해의 안좋았던 일들을 톡톡 터뜨려 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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