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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장의 완성

명동교자 화장실에서 깨달음을 얻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얘기거리들은 보통 쌍디귿으로 시작한다는 말이 있다.  ㄸ이라던가, 다른 ㄸ이라던가, 또 하나의 ㄸ에 대한 얘기들 말이다. 아 이것 참, 구체적으로 단어들을 쓰려 하니 산수유 광고 찍는 천호식품 사장님 기분을 알 것 같네. 말로는 거리낌없이 뱉는데 쓰자니 왜 이토록 힘든가. 지킬 체면이 있는 것도 아닌데. 다른 비속어들은 그렇다 치고 이건 엄연히 표준어인데. 이렇게 합리화해도 여전히 힘들다.


그렇다. 나는 항상 생각해왔다. 왜 우리는 그것을 터부시하는가. 왜 그것은 고작해야 격없는 친구들의 술자리 농담 소재로나 쓰일 수 밖에 없는가. 상쾌한 아침을 여는 신호탄이자 날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끔 자리를 비워주는, 그 소중한 것은 왜 ‘점잖음’의 반대처럼 여겨져야 하는가. 그리하여 왕후장상의 씨앗이 따로 있다더냐,를 외치며 분연히 떨쳐 일어나던 어느 조선시대 노비의 마음으로 분연히 써보고자 한다.


술을 안 마시는 사람이 부러운 딱 하나의 이유는 해장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해장이란 범죄자의 고해성사와 같다. 옳고 바른 해장없이는 밤의 즐거움도 찾아오지 않는 법이다. 오랜 음주 경험으로 터득한 해장의 3대 요소는 잠과 음식, 그리고… 그거다. (이 분연한 마음에도 아직 일반명사를 쓸 용기는 나지 않는다. 대단하다.) 숙면으로 피로를 날리고, 넘쳐나는 해장용 음식으로 아직 술에서 깨지 않은 소화 기간을 각성 시키고 나면 어김없이 신호가 온다. 술을 안마신 다음 날의 신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강하고 격한 파상공세가 펼쳐진다. 아드레날린 업그레이드 끝난 저그 400마리가 본진을 향해 달려드는 것이다.


이 신호앞에 나는 썬캡을 쓰고 한강변을 걷는 아줌마처럼 화장실로 파워 워킹을 하게 된다. 마음의 준비가 끝나자마자 몸에서 전날의 흔적들이 쏟아진다. 고통과 쾌감이란 종이 한 장 차이 이자 뫼비우스의 띠로 연결됐다는 사실을 욕탕의 아르키메데스처럼 깨닫게 된다. 인체란 이토록 신비로운 존재요 깨달음의 스승이다. 그 가르침은 늘 다르다. 프리즘을 통과한 빛처럼 다채롭게 일상에 투과되곤 한다. 고통과 쾌감의 비율과 강도에 따라 해장은 마침표와 느낌표와 물음표와 말줄임표를 넘나들며 마무리 된다. 그리고 아주 아주 가끔은, 느낌표가 말줄임표에 찍힌 점의 갯수만큼 늘어서는 때가 있다.


동이 틀 무렵까지 술을 마셨다. 그 날 집에 간 것은 자리가 파해서가 아니었다. 여기서 한 잔만 더 마셨다가는 아주 골로 가겠다는 본능적 직감때문이었다. 눈을 뜨니 오후 2시 반. 근 아홉시간을 잤다. 좋아. 피로는 풀렸다. 속은 요동쳤다. 명동으로 향했다. 지진을 감지하는 동물들처럼 격한 해장이 필요한 날은 몸이 특정한 음식을 요구한다. 그걸 먹어야 한다. 동종동식이라는 중화 일만년의 이치를 실천해야 한다.


명동 교자에서 만두와 칼국수를 시켰다. 마늘 잔뜩 들어간 김치와 함께 참기름과 육즙이 조화를 이루는 만두를 한 알 씹었다. 진하기로 따지자면 한국 최고인 칼국수 국물을 들이켰다. 보들보들한 면빨을 다이손 청소기가 된양 흡입했다. 사리도 추가해서 포만감을 극대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음식 해장이 끝났다. 첫 문장과 본문이 끝났으니 이제 서사의 마지막을 장식할 타이밍. 대평원에 난데없이 바위산이 솟아오르듯 신호가 왔다. 직감했다.


아,

이거

크다.


파이로와 아이스맨이 불과 얼음의 대결을 하는듯한 이 격렬함이라니. 결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찰나의 정적과 함께 장이 잠에서 깨어난 드래곤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흡,

숨을 참고 추진력을 추가했다. 고통의 서브, 쾌감의 리시브. 서사가 여느 때와 같은 마침표로 끝나나 했다. 복장과 표정을 수습하려던 순간, 다시 신호가 난왔다. 지금까지의 일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한, 첫 신호만큼이나 강렬한 신호였다. 고통과 쾌락의 이중주 역시 반복 연주되었다. 어제 내상이 심하긴 심했군, 이라며 겸허히 몸에 의식을 맡겼다. 다시 복장과 표정을 수습하려고 하던 순간, 그리고 또 다시 신호가 왔다.


되돌이 표로 점철된 악보가 내 몸 깊숙이 새겨져 있는 건 아닐까.

운명이다.

받아들여야 한다.

거역해선 안된다.


모든 근심과 걱정을 잊고 물살에 운명을 맡기는 돛단배가 되고자 했다. 딱히 시간을 재지는 않았으나 네 곡 반 정도의 노래를 들었으니 15분 정도였다고 어림짐작할 수 있는 발포의 순간들이었다. 15분, 15분인 것이다. 변비를 모르고 사는 사람이 15분이나 화장실에 스스로를 가둘 일이 인생에 몇 번이나 있을까? 적어도 나에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영겁과 같은 시간은 있어도 영겁은 없는 법.  시작이 있으면 종결도 있는 법. 모든 것이 끝났다. 고통도 쾌감도 없었다. 찰나의 시간차로 현재는 과거로 흘러갔다. 존 레넌의 ‘이매진’이라도 흥얼거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노래란 때때로 그렇게 의외의 시공간에서 와닿곤 한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 휴일의 명동답게 인파가 가득했다. 커플도, 외국인 관광객도, 예수천국불신지옥 아저씨도 명동을 흘렀다. 그 인파 속에서 나는, 꽤 행복한 표정으로 걸었다. 영혼까지 해장된 느낌이었다. 보리수 나무 아래의 석가모니라도 된 것 같았다. 지난 날을 떠올렸다. 월드컵 경기장에서 마포구청역 화장실까지 배를 붙잡고 걸었던 순간이 있었다. 동남아에서 물갈이로 인해 4일동안이나 화장실을 가지 못해 변비약을 먹은 후 자다가 벌떡 일어나 변기로 달려갔던 때도 있었다. 운석처럼 갑자기 날아온 신호에 공중 화장실을 찾아 해매던 일은 부지기수였다. 그 모든 날들이 다 부질없었다. 역대급 해장이었다. 곰곰히 생각했다. 앞으로 또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 차창안으로 들어오는 도시의 바람은 마냥 싱그러웠다.


*똥 트릴로지 Pt. 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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