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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능력

공감각을 얻을 수 있다면

슈퍼 히어로 영화를 좋아한다. ‘나에게도 저런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망상을 한 적도 있다. 스파이더맨 처럼 건물과 건물 사이를 날아다니고 싶었다. 아이언 맨의 끝내주는 장갑을 입고 싶었다. 헐크처럼 괴물이 되고 싶지는 않았지만 슈퍼맨처럼 알고보니 부모님이 우주인 같은 상황은 겪어보고 싶었다. 아득한 옛날이다. 그럴 나이는 지나도 한참 전에 지났다. 


어느 순간, 나에게 초능력 비슷한 게 있다는 걸 알았다. 자리 탐지기랄까, 대중교통에서 곧 내릴 사람을 기가 막히게 잘 찾아 낸다. 평일 오후의 한적한 지하철은 물론이고 심지어 퇴근 시간의 2호선에서조차 능력은 빛을 발휘한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빠르면 다음 정거장, 길어야 세 정거장이면 일어난다. 행색이 추레해서 그럴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라. 나름 잘 차려 입었을 때도 이 능력은 빛을 발한다. 어쩌다가 간혹 네 정거장 이상 자리가 나지 않으면 능력을 잃은 히어로처럼 초조해진다. 지하철안에서 알콜 중독이 될  때까지 술을 마시고 싶어질 정도다. 지금까지도 운전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인 나로서는 일상 생활에 유용한 능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이 능력과 트레이드해서 다른 능력을 얻을 수 있다면 공감각을 갖고 싶다. 물론 공감각을 능력이라고 하기는 애매하지만 아무튼 아무나 갖고 있는 건 아니고 심지어 대단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능력이니 초능력이라면 초능력이다. 이게 얼마나 끝장나는 경험이냐, 실제 공감각 능력자인 뮤지션들의 경험을 소개하겠다. 먼저, 소리를 색깔로 느낄 수 있는 토리 에이모스의 말이다. “...모든 노래는 마치 빛으로 뭉쳐진 덩어리처럼 보였고, 나는 그것을 건드려 깨트리곤 했다. 35년간 그것을 반복하다보니, 나에게 있어 어렵거나 복잡한 곡은 없었다…곡을 듣는 것은 마치 만화경을 보는 기분이었다.” 로빈 히치콕은 맛을 소리로 느낀다고 한다. “몇년 뒤에 기차를 타고 가면서 베이컨 샌드위치를 먹는 순간 귀에 브라이언 페리의 솔로곡이 들렸다. 난 그날 이후로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빌리 조엘은 심지어 글자와 음악을 색으로 느낀다고 한다. 어느 인터뷰에 따르면 가사에 쓴 글자가 서로 다른 색깔로 보인다고 한다. A, E, I는 선명한 푸른색이나 녹색으로, T, P, S는 붉은색으로, 그밖의 알파벳은 오랜지색으로 보이는 식이다. 신기하지 않나. 마리화나를 비롯한 어떤 성분을 섭취할 때나 할 경험을 일상적으로 할 수 있다니 부럽기 까지 하다. 하지만 이런 능력이 지구를 구하거나, 전쟁을 종결하거나, 하다못해 연애에 도움이 될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연애에는 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흠) 그래도 직업에는 매우 유용한 스킬이 되지 않을까. 


음악에 대해 쓰기 위한 여러 방법론이 있다. 음악가를 중심으로 쓰는 저널리즘적 쓰기, 그 음악이 소비되는 방식에 대한 문화비평적 쓰기가 있다. 가사를 중심에 놓고 쓰는 문학적 방법론도 있다. 악기 연주에 능하거나 어느 정도 절대 음감이 있는 이라면 화성 진행이라던가 사용된 이펙터를 분석하는 글을 쓸 수도 있다. 음악적 지식이 충만하다면 그 음악에 영향을 준 다른 음악들을 끌어와서 하나의 계보를 그릴 수도 있다. 이 음악이 기존의 음악들과 어떻게 다른지, 어떤 영향을 미칠 지를 짚어내는 사회적, 미학적 쓰기도 있다. 그 외에도 여러 방법들이 있다. 음악 평론가란 보통 여러 방법론들을 활용해서 음악에 대해 쓰는 사람을 말한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그렇다. 


자, 그렇다면 음악 그 자체에 대해서는 어떻게 쓸 수 있을까. 글이란 시를 제외한다면 내러티브를 갖기 마련이고, 음악에는 언어의 내러티브가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 인상비평이 존재한다. 한국에서 인상 비평으로 가장 알려진 분은 80년대 심야 라디오를 주름잡았던 전영혁이다. ‘천둥을 울리는 듯한 드럼’ ‘줄이 끊어질 듯한 기타’ 등등의 무협지적 표현들이 그 때 그 분이 즐겨 쓰셨던 표현이다. 우리는 그런 표현에 열광하며 자랐던 세대다. 시간이 흘렀지만 인상 비평은 여전히 유용하다. 나 역시 종종 사용하기에 스스로의 표현을 재활용하기엔 부끄럽고… 음, 굳이 말하자면 <신의 물방울>을 떠올리면 된다. 그 정도의 과장법까지는 아니더라도 음악을 들었을 때 가지는 느낌을 설명 가능한 (혹은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다른 감각이나 경험을 통해 전달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방식을 ‘번역’이라고 부르곤 한다. 그러나 인상 비평은 본질적으로 한계를 가진다. 최소한의 객관성을 확보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귀와 마음은 누구에게나 다른 법이니까. ‘그 음악을 들으며 가졌던 감정을 너무 잘 표현했어요’라는 반응을 가뭄에 콩나듯이라도 받으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유다. 


그런데 만약 공감각 능력이 있으면 어떨까. 음악을 들을 때 문장으로 느낀다면 말이다. 예를 몇 개 들어보자. (1)엑스엑스의 앨범에서 비오는 밤, 3년간의 연애를 끝내고 기네스에 잔뜩 취한 채 런던 옥스포드 스트리트를 배회하는 벤 셔먼 차림 사내가 지난 일주일간 겪었던 이야기가 펼쳐진다. (2)걸 그룹의 노래에서 녹음할 때 각 멤버들이 서로에게 가지는 존경(어머, 얘는 어떻게 이렇게 노래를 잘하지?)이나 질투(아니, 쟤는 왜 저렇게 튀지 못해 지랄을 하는 거야.)가 고스란히 문장으로 전해진다. (1)의 능력을 갖고 있다면 자신이 사용할 표현을 약간 다듬어서 엄청난 확신을 가지고 쓸 수 있다. 게다가 머리를 쥐어짜 새로운 표현을 만들 필요가 없다. (2)의 경우라면 창작자, 혹은 가수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어 창작의 의표를 뚫을 수 있다. 어떤 경우던 적어도 음악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유용하디 유용한 능력이 아니겠는가. 들으면 실시간으로 쓸 수 있으니 원고 생산량이 대폭 늘어나거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티스트를 찔끔하게 할 수 있으니 ‘칼잡이’ 나 ‘쪽집게’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이문이 남아도 이렇게 남는 장사가 없…을리가 없다. 


빌리 조엘은 ‘Piano Man’이후 두 장의 상업적 실패작을 내놨고 음반사로부터 계약 해지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그 결과 나온 앨범이 ‘Just the Way You Are’등이 담긴 명반 <The Stranger>다. 토리 에이모스 역시 오랜 무명 시절을 거쳤다. 그들의 공감각 능력이 재능으로 분출되었다면 겪을 필요가 없는 시간이었을 게다. 그들 역시 자신의 능력과는 별개로 창작의 고통앞에 머리를 싸맸다는 점에서는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결과가 우월했을 뿐이고, 심지어 공감각 능력이 없어도 그들 못지 않은 성과를 낸 이들이 음악의 역사를 발전시켜왔다. 그러니 만에 하나 벼락을 맞고 깨어났더니 없던 공감각 능력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음악을 들을 때 문장을 쥐어짜게 될 것이다. 음악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마음을 읽고자 노력할 것이고, 문학이나 미술에서 음악과 연관지을 거리가 없을지를 고민할 것이다. 방사능 거미에 물렸다하여 피터 파커의 일상 그 자체가 변하지 않는 것 처럼 말이다. 


PS. 브루스 웨인이나 토니 스타크의 참된 능력, 즉 막대한 부는 그럼에도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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