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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불꽃의 사자여라

얼음같은  물에 머리 감기

깊고 깊은 바다속, 나무수염아귀라는 심해어가 산다. 암놈은 화려하다. 거대한 몸집에 야광처럼 빛나는 수염을 달고 다니며 먹이를 잡는다. 열악한 먹이사슬 환경이 그런 수염을 발달 시켰을 것이다. 수컷도 진화했다. 오직 생식을 위해서 나무수염아귀의 수컷은 살아간다. 암컷의 20분의 1도 되지 않는 몸의 90%가 정소다. 그리고 암컷의 몸을 뚫고 들어가 피를 빨아먹으면서 살아간다. 정자를 공급하는 댓가로 평생 암컷을 빨아먹는다. 수컷이란 대게 그러하다. 어떤 환경에서도 생식의 본능만은 잃지 않는다.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수컷이란, 그런 본능의 나침반을 따라 물을 건너고 산을 넘는다.


가난이 그 어떤 친구 이상으로 가깝던 시절이 있었다. 상도동의 어느 지하방도 아니고 옥탑방도 아닌 쪽방은 그 시절의 배경이었다. 분명히 지상 1층이었는데 하루종일 해가 들지 않았고 분명히 독립된 방이었는데 이웃의 가난한 부부가 밤마다 내뱉는 교성이  돌비 스테레오급 사운드로 들리는, 그런 방이었다. 


어서 빨리 돈을 모아 옥탑방으로, 아니 하다못해 지하방으로 가자, 라는 다짐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 달 그 달의 월세, 아니 공과금 조차 내기에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버거움은 오래 가지 못했다. 불가능이 되었다. 월세가 밀려가고 보증금이 까였다. 전기와 수도가 끊기면 자살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본능적으로 둥실둥실 방안을 떠돌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버티게 한 존재는 둘이었다. 하나는 친구였다. 놈은 나보다 더욱 더 궁핍했다. 몸을 뉘일 방 조차 제대로 없었다. 뮤지션이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왔으나 현실은 막막했다.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처지에 놈의 독립심이 더해져 2년째 홈리스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우리 집에도 종종 왔다. 항상 족발에 소주 두병을 사들고 집에 찾아와 뼈를 핥고 병바닥을 쪽쪽 빤 후에야 우리는 잠들곤 했다. 그래도 들국화의 '사노라면' 보다는 라이터스 패밀리의 'High'를 들으며 우리는 껄껄 웃곤 했다.


또 하나는 여자 친구였다. 그녀의 처지는 나와는 정반대여서 그야말로 순결한 마음의 영원한 햇살같은 존재였다. 인생에, 아니 가문 대대로 실패란 단어는 활자조차 없었다. 자기 집 개집만도 못한 내 방을 그녀는 잘도 찾아오곤 했다. 웃으며 방청소를 해주고 가끔은 기름도 배달 시켜줬다. 덕분에 겨울만은 따뜻하게 날 수 있었다. 그녀가 올 때는 언제나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었다. 회 아니면 고기 한 근을 쫄래 쫄래 들고, 그녀는 웃으며 방문을 열곤 했다. 그녀의 존재 만으로도 동토의 청춘에 한줌의 이끼 싹이라도 자랄 수 있었던 것이다. 


친구는 운이 좋았다. 삐삐도 없는 그 놈은 어떻게 알고, 여자 친구가 와 있을 때 마다 삐걱, 방문을 열었다. 생존의 안테나가 놈을 상도동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당장의 단백질이 아무리 시급하다고는 하지만 미친듯이 고기와 생선을 먹기만 해서야 체통이 서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셋은 이런 저런 대화를 하며 북극과 그린란드의 사이, 정도에 있는 그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여자친구는 놈에게 자기 친구들 얘기를 종종 하곤 했다. 삶이란 대체로 유유상종인 법, 여자친구의 친구들도 대부분 괜찮은 아이들이었다. 역시 실패를 몰랐고 바닥에 발을 대본 적 없었다. 성격도 착했고 순진무구의 성벽에 둘러 쌓여 소녀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그런 친구들을 그녀는 자랑스레, 놈에게 얘기했다. 그러나 당장의 차비를 걱정해야 하는 놈으로서는 소개팅을 시켜달라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놈은 그녀의 친구들을 이 방에 초대하면 어떻겠느냐, 나에게 눈치를 주곤 했지만 나로서도 여친의 체면을 살려주고 싶었다. 그건, 해선 안되는 짓이었다. 먼저 온다고 하면 모를까, 공주님들을 노숙자 쉼터에 초대할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 날 그녀가 기름값을 주고 갔다. 부끄러워하면서 받았다. 어쨌든, 햇볕 한 줌 안들어오는 방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집에 가고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친구가 삐걱,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미 술에 취해 있었다. "뭔 일이냐." "아 씨발, 세상이 정말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시골에 있었으면 칵 농약이라도 먹었을텐데." 그 뒤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었다. "야, 닥치고 술이나 마시자. 족발이랑 술은 사왔냐?" "....마포에서 여기까지 걸어왔..."" ㅆㅂㄴ, 그나마 숙박비도 없이....."


돈이 없기는 나나 그놈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장 농약을 먹고 싶은 친구가 있고 여자친구가 주고 간 기름값이 있다. 어쨌든, 그 때는 내일 일을 생각할만한 여유도 없었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 날 밤 삼겹살 두근을 먹었고 소주 네병을 마셨다. 당시 기름과 삼겹살과 소주의 시세가 얼마였는지는 잊어먹었으나, 다음 날 아침 기름값이 없었다는 건 분명했다. 때는 바야흐로 12월 초순, 제야의 종소리와 크리스마스 캐롤이 스멀스멀 거리로 기어다닐 때 였다. 그 뒤로 며칠이 지났다. 


햇볕 한 줌 안드는 방이었다. 바닥에선 냉기가 개미때처럼 기어다니는 방이었다. 보일러를 키지 않으면 전기장판을 틀어도 입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왔다. 차비도 없었기에 놈은 우리집에 아예 눌러 앉았다. 차마 남자끼리 부등켜안지는 못하고, 서로의 체온을 미묘한 거리로 느끼며 입김을 뿜어내다가 잠이 들기를 며칠, 우리는 그렇게 얼어서 썩어가고 있었다. 동면에 가까웠다. 인간이 항온동물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우리는 바위밑의 도마뱀처럼 겨울을 나고 있었다. 씻지도 않았다. 아니, 씻을 수 없었다. 보일러가 며칠째 멈추다보니, 그렇잖아도 찬물은 더욱 차가워졌다. 물을 한 다라이 받아놓으면 <품행제로>처럼 최민수가 말을 타고 나타나 "저 물은 어머니의 자궁, 옷을 벗고 들어가라"라고 말할것 처럼 차가운 물이었다. 손을 대기만 해도 아팠다. 세수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동면의 나날을 보내던 아침,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였다. "오빠, 집이야? 나 친구들이랑 차타고 가다가, 애들이 오빠 보고 싶다고 해서 오빠 집 근처로 갈 건데 나와라. 같이 밥이나 먹자." "어, 근데 **도 같이 있는데...." "그 오빠도 나오라 그래, 같이 보지 뭐." "알았어. 그럼 몇시까지 상도시장앞 무슨 고기집에서 보자." 전화를 끊고 자고있는 녀셕을 깨웠다. "얌마, 일어나라 여친 온덴다. 친구들도 같이 온다고 점심 먹제." 그 말을 듣는 순간, 놈은 사자의 습격을 받은 톰슨 가젤처럼 벌떡 일어났다. "아 씨발 어떻게하지 내 머리, 내 머리" 일주일동안 감지 않은 놈의 머리는 톰슨 가젤의 몸위에 둥지를 튼 깃발쏙독새둥지와 같았다. 놈은 한 숨을 몇번 내쉬었다. 그리고는 톰슨 가젤을 발견한 사자처럼 크게 심호흡을 했다. 성큼성큼, 화장실로 걸어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보일러가 멈춘 상도동 쪽방의 수돗물은 당장 살얼음이 섞여나온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차가웠다. 튼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용기가 필요할만큼 차갑디 차가웠다. 녀석은 그 수도를 있는 힘껏 열어 제꼈다. 그리고 머리를 갔다댔다. 크으응, 크으응, 마치 교미하는 톰슨가젤 같은 기묘한 신음소리를 내며 놈은 머리를 감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는 나까지도 머리가 아파왔다. 결국 크아아아 크아아아, 사정하는 숫사자처럼 소리를 고래 고래 지른 후에야 녀석의 머리 감기는 끝이 났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수컷이란 얼마나 위대한가. 여자를 만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최민수를 능가하는 박력으로 남자란, 불타오를 수 있구나. 놈의 그 불타오르는 집념에 흡사, 3점슛을 넣는 정대만을 보며 줄줄 흐르는 눈물과 함께 '불꽃남자 정대만'이라는 깃발을 흔드는 영걸이가 된 기분이었다. 


친구중에 급한 일이 생긴 애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오늘 약속을 깨야겠다는 여자친구의 문자가 왔다. 차마 그에게 게임 끝났어, 라 말할 수는 없었다. 적진을 향해 맹렬히 드리블하는 정대만이라도 된 것 처럼, 그는 불타는 눈빛으로 발을 닦고 있었기 때문이다.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으괴괴겕, 으괴괴겕 포효하며. 놈의 노란 머리가 바람결의 사자머리처럼 좌우로 흩날렸다. 펑크를 하던 놈이, 이 사건이후 멜로딕 데스 메탈을 하는 건 아닐까 나는 생각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2015년 마지막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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