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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

나의 알콜 인생

어른이 된 이후 20년 간의 삶을 돌이켜보면 참 단순하다. 음악과 술. 항상 음악을 들었다. 술을 마셨다. 그냥 음악만 듣는 것 보다 술마시며 듣는 게 좋았다. 지금도 그렇다. 아무리 술이 맛있어도 음악이 후진 곳은 가지 않았다. 보통 음악 술집을 가면 맥주를 마시고, 음악이 없는 곳에서는 소주를 마셨다. 예쁜 아가씨와 함께 하면 좋았고 말이 통하는 친구와 함께 해도 좋았다. 여기까지면 굉장히 단순했을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박카스는 나를 그 심플 라이프에 머물게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소주와 맥주, 그리고 숙취를 반드시 유발하는 막걸리(그 때 막걸리의 주된 성분은 밀이었음)나 마시던 대학교 4학년생을 새로운 알콜의 대지로 안내한 그 분은 저 멀리 멕시코에서 오셨다.


거룩하사 그 이름하여 데낄라. 이제 겨우 스무살임에도 불구하고 호사를 알고 있던 동생이 나를 엘도라도로 이끄는 콩키스타도르였다. 홍대앞의 한 바에서, 녀석은 거만한 표정으로 호세 꾸엘보라는 낯선 이름을 주문했다. 곧, 엘도라로의 황금빛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 등장했다. 소금과 레몬이 딸려 나왔다. 녀석이 시키는데로, 소금을 살짝 집어 입에 털어 넣은 후 스트레이트 잔을 원샷 했다. 그리고 레몬을 씹었다. 그 순간, 생각했다. ‘졸업하고 취직을 하면 첫 월급으로 데낄라를 보틀로 사서 키핑해놓고 조금씩 마시겠어’. 그만큼 강렬했다. 99년 가을, 세기말이었다.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됐다. 어쩌다보니 취직을 했다. 월급을 받았다. 바로 그 술집으로 달려가 데낄라를 주문했다. 누구랑 마셨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예쁜 아가씨와도 마셨고 말이 통하는 친구와도 마셨다.  홍대앞에 한 동안 이런 소문이 돌았을 정도다. “김작가가 뜨면 데낄라가 뜬다.”


그 후 온갖 술들을 전전했다. 음, 그래봤자 보드카 정도였다. 도무지 위스키는 정을 붙일 수가 없었다. 와인 맛도 알겠고, 사케 맛도 알겠는데 위스키는 차라리 희석식 소주만도 못했던 것이다. 위스키로 폭탄을 만드는 한국 아저씨들의 행태도 한 몫 했을 거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밀레니엄도 십년쯤 지났을 무렵, 처음으로 영국 여행을 하게 됐다. 런던을 거쳐 에딘버러로 향했다. 스코틀랜드에 왔는데 스카치 위스키는 마셔봐야지, 라는 생각에 아무 위스키샵이나 들어갔다. 커다란 오크통이 여기 저기 쌓여 있고, 한국에서는 본 적도 없는 위스키들이 빼곡했다. 마스터에게 추천을 부탁했다. 손톱만한 잔을 꺼내더니 이 오크통 저 오크통에서 조금씩 다른 술을 따라 건내줬다. 그 순간, 생각했다. ‘그 동안 내가 한국에서 마신 위스키는 다 뭐였단 말인가’ 화도 났다. '이렇게 맛있는 걸 지들끼리만 마시고 있었단 말이지' 르데익(Ledaig) 9년산 한 팩을 샀다. 저녁의 에딘버러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칼튼 언덕에 올라 반 팩을 야금야금 마셨다. 싱글몰트는 그렇게 나에게로 왔다.


그 후 기회가 될 때 마다 공부하듯 싱글몰트를 마셨다. 돈이 없기 때문에 고수들의 가르침을 받는 쪽이었다. 운좋게도 내 주변에는 술꾼들이 많다. 돈도 많고 열정도 있는 그런 술꾼들이. 많은 사사를 받았다. 싱글 몰트를 쫙 모아놓은 시음회도 종종 다녔다. 즐겁게 배웠다. 한 잔 한 잔 마시면서 스코틀랜드에 갔을 때 양조장에 가보지 않았던 2009년의 미성숙한 나를 원망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니 압도적으로 훌륭했던 한 잔이 있다.  놀랍게도 스코틀랜드 산이 아니다. 포크 가수이자 내 주변 술꾼 중 으뜸을 다투는 손병휘형 덕에 만난 세계다.  SMWS 라는 세계적인 조직(이라 쓰고 술덕후들의 모임이라 읽자)에서 주최하는 행사에서 마신 이 한 잔은 일본에서 생산됐다. 히말라야의 험준고령같은 스카치 위스키 사이에서 이 술은 에베레스트처럼 우뚝 솟았다. 흔히 일본 위스키하면 선토리나 니카의 제품들을 떠올리기 마련이고 (사실 나도 그 둘 밖에 몰랐다) 스카치 위스키와는 다른, 일본 위스키만의 매력이 있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진 편이다. 하지만 카루이자 증류소의 이 한 잔은 그간 알고 있던 일본 위스키의 맛을 아득히 초월했다. 우열을 넘어, 다른 스카치 위스키와도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일본왕실의 별장지로도 알려진, 나가노현에 위치한 카루이자와 증류소에서 생산된 이 위스키는 28년을 쉐리통속에서 묵었다. 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 원액의 알콜 도수는 59.5. 통상 위스키를 시음할 때는 반모금 정도를 목속에 꽂은 후 혀로 퍼지는 맛과 속에서 올라오는 향을 즐기기 마련이지만 이 한 잔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단 한 방울을 스포이트로 빨아들이듯 입속에 넣는 것만으로도 부족함이 없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한 방울에 왠만한 위스키 한 병을 능가하는 강인한 '생명력'이 있었다. 비강의 후각 세포를 한 점 남김없이 훑은 후 폐속에 문신을 새기는 듯한 향기와 농후하고 달콤하며 씁슬한, 그리고 이 모든 형용사의 극점을 찍되 그 모든 것들이 조금의 흐트러짐없이 조화를 이루는 맛이 한 잔 이상의 한 잔을 만들어냈다. 술을 넘어 언어이자 서사였다. 한 모금도 안되는 분량을 위해 30분 가까이를 소모한 건, 그리하여 당연한 일이었다. 카루이자와가 담긴 얇디 얇은 SMSW전용잔이 강렬하되 부드러운 입술 같았다. 잊지 못할 키스를 하는 기분이었다. 어른의 즐거움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카루이자와 증류소는 현재 폐쇄됐다고 한다. 이런 멋진 위스키를 만드는 증류소가 대체 왜? "상품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최고의 위스키를 만드는 데만 몰두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영광스러운 한 잔을 맛보게 해준 형의 답이었다. 꽤 오랫동안 남아있는 향과 함께 보틀링 전 시음을 하며 자신들의 비타협적 태도에 뿌듯함을 느꼈을 카루이자와 증류소 직원들의 자긍심이 전해졌다. 애주가로서 그간 적지 않은 술을 마셨다. 고수들 앞에서는 초라해도 일반적인 경험보다는 많을 것이다. 그 한 잔 한 잔을 즐기고 기억하려 했다. 제품을 넘어서는, 작품으로서의 위스키는 처음이었다. 밤사이 그 향이 계속 깊은 들숨을 타고 올라왔다. 혹은 그런 착각이었다. 앞으로도 두고 두고 잊지 못할, 또한 마시지 못할 한 잔의 기록에 살을 덧붙여 썼다.  반년이 지난 지금도 향과 맛이 생생하다. 능히 인생의 한 잔이 될 자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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