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도의 근대정신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이처럼 고생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잠자코 술잔을 내밀고 당신은 그걸 받아서 조용히 목 안으로 흘려 넣기만 하면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에 나오는 문장이다. 그렇다. 위스키는 거짓이 없는 언어다. 즉각적이다. 여운이 있다. 좋은 작가들이 자신만의 문체를 가지듯, 좋은 위스키역시 자신만의 향과 맛을 가진다. 대체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그것은 하나의 주장이자 관점이다. 잊지못할 밤을 선사해준 여인의 육체와도 같다.
위스키의 5대 산지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일본이다. 아일랜드에서 탄생해 스코틀랜드에서 보편화되었으며 이 지역 출신 이민자들에 의해 미국과 캐나다로 퍼졌으니 켈트족의 가계도와 같은 술이다. 하지만 켈트의 피 한 방울도 이어받지 않은 일본에서 좋은 위스키를 생산한다는 게 의외일 수도 있다.
일본 위스키의 역사는 100년에 이른다. 1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20년,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떠나 현지 증류소의 공장장까지 역임하며 스카치 위스키 제조 기술을 전수 받아온 다케츠루 마사타카를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라 꼽는다. 야마자키, 히비키 등으로 유명한 산토리에서 일본 위스키를 탄생시켰고 퇴사 후 자신의 회사 닛카를 설립, 홋카이도 요이치시에 첫 증류소를 세웠다. 산토리와 닛카가 일본 위스키 시장의 99%를 점유하고 있으니 일본 위스키의 역사는 곧 다케츠루 야마시타와 그 후배들의 노력과 정성에 다름 아니다.
일본 위스키는 부드럽다. 섬세하다. 스카치 싱글 몰트의 향과 맛이 식도를 뚫고 올라오는 용천수라면 일본 위스키의 그것은 솜씨좋은 조경사가 나뭇잎에 분무기로 뿌리는 물처럼 퍼진다. 내노라하는 싱글 몰트들의 개성을 합쳐 자신의 개성으로 결합시킨다. 일본 위스키의 명성이 드높아진 건 2007년이다. 영국에서 열린 세계 위스키 품평회에서 일본 위스키들이 종주국을 제치고 상을 휩쓸었다. 가장 최근인 2014년, 2015년에도 그랬다.
이런 특성은 일본 대중음악과도 맞닿아있다. 1980년대 후반, 거품경제의 절정에서 시부야케이라 불린 음악이 탄생했다. 시부야의 레코드 샵을 휩쓸던 청년들이 ‘우리가 들을 음악은 우리가 만들겠다’라는 모토하에 서구의 온갖 음악들을 섞어 새로운 음악을 만든 것이다. 록과 소울, 재즈와 보사노바 등 그들이 듣고 자란 모든 음악이 하나로 범벅되며 정작 서구에선 없던 음악이 됐다. 아무로 나미에, 우타다 히카루 등 제이 팝을 대표했던 가수들의 미국 진출은 실패로 끝났지만 피치카토 파이브, 플리퍼스 기타 등 시부야케이의 창시자들은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도 팬을 형성했다. 평론가들도 열광했다.
일본적인 술하면 사케나 소츄를 떠올릴 것이다. 이런 술들이 왜색이라 하면 위스키는 일본적이다. 오타쿠 혹은 장인 문화에 기반을 두고 서구의 것을 파고들고 혼합하여 익숙하되 충격적인 것을 만든다는 면에서 그렇다. 일본 여행을 할 때 야마자키, 요이치 등의 증류소를 꼭 가봐야할 이유다. 탈아입구를 꿈꾸던 시대의 일본이 거기에 있다. 오크통 속 금빛 액체에 근대 일본의 환상과 동경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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