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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비어 라오

메콩강에서의 사랑과 평화



그 해 겨울은 더웠다. 따뜻했던 게 아니다. 말 그대로 더웠다. 크리스마스에도 신년에도 반 팔과 반바지를 입고 거리를 돌아 다녔다. 이유는 간단했다. 동남아 여행 중이었다. 한국에서라면 소주에 오뎅탕을 먹고 있을 계절이었지만 맥주를 물처럼 마셨다. 역시 여름은 맥주의 계절이다. 


태국과 캄보디아를 거쳐 라오스로 넘어갔다. <꽃보다 청춘>덕에 요즘은 방비엥 같은 관광도시 곳곳에 한국어가 적잖이 들린다지만 그 때는 라오스로 여행을 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라오스라는 나라가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원래는 베트남에 갈 생각이었지만 어느 여행자가 남긴 긴 후기를 읽고 일정을 바꿨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시간 여행을 한 기분이었다.” 궁금하지 않은가.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서 그런 경험을 하다니. 


방콕에서 여행자 버스를 타고 밤새 달려 국경을 넘어 수도 비엔티엔에 도착했다. 말이 좋아 수도지, 비엔티엔은 작고 허름했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흔적이 일상속에 묻어 있었다. 관공서에는 라오어와 프랑스어가 병기되어 있었다. 그리 좋지 않은 사연들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 프랑스인들도 적잖이 보였다. 현지인들은 더없이 순박한 표정과 눈빛을 갖고 있었다. 쌀국수로 늦은 점심을 먹고 메콩강변으로 향했다. 


건기의 메콩강은 강이라기 보다는 거대한 늪지에 가까웠다. 뜨겁지만 습하지 않은 공기도 좋았고 선명한 석양은 더욱 아름다웠다. 향수로도 재현할 수 없는 청명함과 포토샵으로도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 색감이 하늘과 땅을 가득 매웠다. 방콕과는 달랐다. 씨엠립과도 달랐다. 최빈국의 하나지만 가난의 그림자는 생각보다 낮은 명도를 가진 이 도시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을 멈추고 있는 이 공기를 만끽하고 싶었다. 그것은 평화였다. 압도적인 평화였다. 무엇으로 이 기분을 극대화할 것인가. 고민할 필요가 없다. 맥주다. 강변의 펍에 들어갔다. 도시만큼이나 허름했지만 호젓했다. 메뉴판의 맥주 종류는 딱 하나였다. 비어 라오. 서구 맥주는 그렇다치더라도 태국에서 즐겨 마셨던 싱하 맥주도 없었다. 스마트폰도 없을 때였다. 라오스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었다. 그러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이 미심쩍음이 몇 초후 탄성으로 바뀔 줄을. 이 허름한 나라에서 이렇게 맛있는 맥주를 만들고 있을 줄을. 


비어 라오는 1970년대 초반, 베트남전의 불길이 라오스에도 미치고 있을 당시에 탄생했다. 독일에서 맥주 양조시설과 맥주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홉을 들여왔지만, 열대성 기후에서 보리는 별로 생산되지 않았다. 대신 쌀이 있었다. 이모작은 물론이고, 삼모작까지 가능한 천혜의 기후덕이었다. 그래서 쌀로 맥주를 빚기로 했다. 당연히 우리가 먹는 자포니카종은 아니고 안남미, 그것도 라오스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찹쌀로 생산된 세계 최초의 맥주가 비어 라오다. 라오스를 찾는 관광객들의 입소문이 세계 곳곳에 퍼져 지금은 20개국 이상에 수출된다. 한국에서도 홍대와 이태원 등에서 가끔 만날 수 있다. 


독일의 홉과 라오스의 쌀이 만나 쌉쌀함과 부드러움이 애틋한 조화를 이룬다. 메콩의 석양이 붉디 붉어질 무렵, 우리는 이어폰을 한 쪽씩 나눠 끼고 음악을 들었다. 여름의 음악, 밥 말리를 들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맞췄다. 그녀의 숨내음에 비어 라오의 향이 섞여 있었다. 풍광의 평화에 알콜이 함께 하는 사랑이 얹혔다. 비어 라오는 2004년  ‘타임즈’에서 일본과 중국 맥주를 제치고 아시아 최고 맥주로 선정됐다. 그저 낭만적 여행의 추억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도 아시아 최고의 맥주로 가끔 비오 라오를 꼽는다. 그저 맥주의 맛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김작가(대중음악평론가, 애주가)


http://travel.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1/27/2016012702420.html의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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