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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상트, 녹색의 마주

때아닌 중이염에 걸렸다. 연신 고름이 흐르거나 쑤시는 듯 아프거나 펌프질을 한 듯 부풀어 올랐다. 어찌나 고통스럽던지 그렇잖아도 더러운 성질머리가 흑화되는 듯 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무이자로 일개월 정도 대출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를 때의 심정이 이런 거 아니었을까. (물론 고흐가 그런 건 중이염과 아무 상관없었지만)


고흐가 사랑한 술은 압상트다. 벨 에포크(Belle Époque)라 불렸던 1870년대부터 1910대까지의 50년동안 프랑스 예술가들이 가장 사랑했던 술이기도 하다. 18세기 후반 스위스에서 약용으로 탄생한 이 녹색의 액체는 19세기 중후반 프랑스를 석권했다. 이유는 두가지. 첫 째, 19세기 중반 유럽을 휩쓴 필록세라가 포도밭을 고사시켰다. 1870년대에는 프랑스 포도밭의 40%가 소멸됐다. 따라서 와인 생산도 치명타를 입었다. 질좋은 와인을 구하기는 로또 당첨급이었다. 일상적으로 음용하던 와인의 품질도 곤두박질쳤다. 둘 째, 알제리 전쟁의 영향이었다. 1830년 , 아프리카를 침공한 프랑스군 최대의 적은 말라리아같은 풍토병이었다. 의학 수준이 낮았던 시절이다. 약이 될만한 건 가리지 않고 시험했다. 왠지 몰라도 압상트가 풍토병 예방에 효과가 있었다. 하여, 압상트는 전선의 장병들이 일상적으로 마시는 약(이라고 쓰고 술이라고 읽는다)이 됐다. 알콜에 아니스(팔각), 페넬(회향), 웜우드(쓴쑥)을 넣고 증류한 후 다른 허브들을 넣고 우린 이 초록색의 술과 박하향은 분명히 전장에서의 스트레스를 달랬을 것이다. 


전쟁이 끝났다. 살아온 자들에게 전선의 경험과 악몽은 추억과 무용담으로 미화된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마시던 압상트를 찾았다. 압상트의 수요가 폭증한 것이다. 공급도 늘었다. 많은 회사에서 압상트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파리 어느 술집에나 저렴한 압상트가 깔렸다. 


이 즈음은 온 유럽의 예술가들이 파리로 몰려 들었을 때다. 시대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예술가는 가난하다. 비싼 와인대신 압상트를 마시는 건 그러니 당연했다. 게다가 똑같은 양을 마셔도 와인과 압상트의 알콜 함유량은 서너배 차이, 강렬한 색과 향도 매혹적이었다. 식전주로 한 잔씩 마시는 게 일반적이었던 압상트는 그렇게 예술가들의 일상 음료가 됐다. 자유로운 영혼들을 하루종일 압상트에 취해 있었다. 기행과 퇴폐는 부록처럼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글과 그림으로 압상트를 '녹색의 뮤즈'라 찬양했고, 이에 혹한 부르조아들도 압상트를 들이켰다. 


역시 시대를 막론하고 이런 꼴을 곱게 못보는 이들이 있는 법. 종교계와 식자층이 결합하여 압상트를 퇴치하고자 일어났다. 옛 명성을 회복하려는 와인업계의 지원도 있었다. 이 삼위일체의 공방에 압상트는 졸지에 환각제로 몰렸다. 결국 20세기 초반, 프랑스를 비롯한 다수의 나라에서 압상트의 제조와 판매가 금지됐다. 녹색의 뮤즈가 녹색의 악마라는 오명을 쓰고 말았다. 예술의 낙원에서 금기의 지옥으로 추방된 것이다. 후대의 연구에 의하여 압상트의 환각작용이 낭설임이 판명됐지만 한 번 씌워진 이미지는 오래 가기 마련. 그래서 인생의 첫 압상트는 첫 섹스와 마찬가지로 두렵고 설렌다. 금단의 물약을 마시는 기분이다. 


녹색의 술을 잔에 따른 후 각설탕을 얹은 전용 스푼을 잔 위에 놓고 몇 방울의 물을 따른다. 각설탕을 통과한 물이 압상트와 섞이면 녹색은 희뿌옇게 변한다. 의식을 치루는 기분마저 든다. 취하는 느낌이 다르다는 건 플라시보일 뿐인데 막상 잔을 비워낸 후에는 때 이른 첫 경험을 한 사춘기소년처럼 의기양양해진다. 금단의 이미지가 가진 힘일랄까. 


압상트에 대한 오랜 선입견을 이용해서 자신의 압상트를 런칭한 음악인이 있다. 악마적 이미지로 유명한 록 뮤지션, 마릴린 맨슨이다. 자신의 이름과 압상트를 결합, 맨신트(Mansinthe)이란 브랜드를 내놨다. 압상트에 대한 환상은 깨진지 오래지만 그래도 맨신트는 마셔보고 싶다. 누가 알겠는가. 혈관을 타고 녹색의 뮤즈가 춤을 추거나 녹색의 악마가 뛰어 다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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