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ppa di Brunello
세계 과일 생산량의 30%를 차지하는 종이 있다. 포도다. 와인 때문이다. 그만큼 인류가 와인을 많이 마신다는 걸 증명한다. 이렇게 많은 와인이 생산된다면 그만큼 많은 찌꺼기, 즉 껍질과 씨앗이 남는다. 대부분은 퇴비로나 사용했을테지만 역사는 때로 누군가 발상의 전환을 하면서 바뀐다. 이탈리아의 증류주, 그라파(grappa)는 그렇게 탄생했다.
포도를 이용한 증류주를 대표하는 건 브랜디지만 와인을 통째로 증류한다는 점에서 그라파와는 다르다. 포도 껍질과 씨를 압착한 후 증류해서 만든다. 로마 신화의 발생지인 이탈리아답게 그라파도 그럴싸한 탄생 설화가 있다. 클레오파트라가 다스리던 기원 후 2세기의 이집트에서 어떤 로마 군인이 증류기를 훔쳐와서 포도 껍질을 증류해서 만들었다는 것. 물론 이탈리아를 포함한 서유럽에 증류 기술이 전해진 게 13세기 안팎이니 당연히 거짓말이다. 어쨌든 그 무렵 포도 찌거기를 이용해서 증류주를 만들기 시작했고 16세기 무렵에는 제조 방법이 성문화됐다. 처음에는 숙성없이 마셨지만 현대화 과정에서 체리, 아카시아, 참나무 통에 숙성을 거치며 보다 풍부한 맛을 지닌 그라파가 등장했다.
어느 주말, 친구들끼리 모여 술을 마셨다. ‘학술회’라는, 말 그대로 술을 공부하는 모임이다. 세계 각국의 술을 지참하여 나눠 마신다. 시중에선 좀처럼 보기 드문 술들이 넘쳐 나는데다가 대부분 증류주들이니 막판이 되면 뭘 마시는지도 모를만큼 취하기 마련이다. 이 날도 서서히 의식이 혼미해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병의 그라파가 등장했다. 요즘 일 때문에 이탈리아를 자주 들락거리는 친구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꺼냈다. 아르지아노(Argiano)사의 그라파 디 브루넬로(Grappa di Brunello).
그 동안 적잖은 그라파를 마셔왔다. 분명한 개성은 있지만 최고의 자리를 선뜻 내주긴 힘들었던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직전에도 다른 그라파를 마셨다. 크게 다를 게 뭐 있으랴 생각했다. 취하면 그만이지 뭐. 1온즈 정도를 잔에 따랐다. 향을 맡았다. 응? 털어 넣었다. 헉! 깜짝 놀랐다. 살면서 먹은 모든 포도의 씨앗과 껍질이 이 한 잔에 통째로 농축되어있는 듯 했다. 이미 취한지 오래이건만 그 동안 간과 뇌에 쌓인 알콜 기운이 단숨에 자취를 감추는 기분이었다. 고급 위스키나 보드카, 데낄라 등과는 다른 또 다른 ‘고급’이었다. 그라파의 개성을 극단까지 끌어올려 그라파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까지 무릎꿇게 만들 법한 경지였다.
그 순간 나는 외쳤다. “이탈리아 음악을 들어야겠어.” 그리고 1970년대 이탈리아 음악을 틀었다. 뉴 트롤즈, 라테 에 밀레, 퀘벨라 베키아 로칸다 같은 아트 록 밴드들을 틀고 안젤로 브란두아르디, 카틸레나 카셀리, 루치오 바티스티같은 싱어송라이터들을 틀었다. 킹 크림슨, 핑크 플로이드 등 영국 밴드들에 의해 시도된 아트 록은 이탈리아로 건너가며 이탈리아의 색을 입는다. 비발디, 푸치니, 베르디의 고향 답게 클래식적인 작법과 연주가 대폭 도입된 것이다. 그래서 이탈리아 아트 록은 다른 나라들의 그것보다 아름답다. 낭만적이다. 유미주의의 정점이라 해도 좋다.
따지고 보면 이런 가치야말로 이탈리아적이다. 페라리와 람보르기니 같은 슈퍼카들에서 실용성을 따지는 이들은 없다. 하지만 이 차들의 극한 성능과 디자인을 동경하지 않는 차 마니아또한 없지 않은가. 엄혹한 중세를 끝낸 르네상스 문화를 낳은 이탈리아인들의 이 낭만적 치열함을, 한 병의 그라파에서 느꼈다. 90년대 초반 들었던 이탈리아 음악의 멜로디를 아직 잊지 못하듯, 오랫동안 그 맛과 향을 기억할 거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