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잡글

잡글

by Groovycat

나는 겁이 많고 눈물도 많다. 내가 겁이 많은 건 태생인 줄 알았다.


초등학교 입학 전, 부산 서동(당시 동상동) 비탈길에 다닥다닥 붙은 집에 살았다. 좁은 비탈진 골목을 나오면 바로 2차선 도로가 나왔다. 다니는 버스 노선도 많고 자동차도 너무 많았다. 신호등도 없고 2차선 커브길을 빠르게 지나다니는 차를 보면 너무 겁이 났다. 엄마는 내가 나가서 노는 걸 싫어하셨다. 혹시나 찻길에서 사고라도 나면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른다고 하셨다. 나는 새 아빠와 새 아빠와 엄마 사이에서 낳은 여동생, 그리고 친엄마 이렇게 넷이서 함께 살았다. 내가 사고가 생기면 사람들은 '재가할 때 데려온 딸이라서 일부러 다치게 한거다'라든지, '재가하고 나니 세 식구만 살고 싶어서 그랬다' 등의 말을 할거라고 7살인 나에게 엄마는 너무나 조심을 시키셨다.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아빠는 불의의 사고로 내가 10개월 아기 때 돌아가셨고, 엄마는 그런 불행이 또 닥치게 될까 두려웠을 수도 있다.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게 두려웠고, 나에게 또 큰 일이 닥칠까 두려웠다. 학교 다닐 땐 친구끼리 싸움을 해도 왠지 내 옆으로만 다가오는 것 같았다. 공은 항상 나에게만 날아오는 것 같았고, 정말로 야구공에 눈을 정통으로 맞은 적도 있었다.


불행이 갑자기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그렇게 조심하면서 살았지만 새 아빠의 두 아이들, 즉 내 동생들은 각각 정신지체 1, 2급이 되었다. 천천히 다가온 불행은 나중에도 더 깊은 상처가

되었어도, 결혼을 하면서 내가 이 집을 나가게 되면 나는 화려하진 못해도 평범하게 살 줄 알았다.



중국에서 일을 하다 만난 중국인 남편, 그는 6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자살이었다. 그의 집에서 그것 역시 갑작스레 찾아온 불행이었기에, 시댁 역시 항상 조심 또 조심이었다. 두 손의 엄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면 ‘무덤’을 뜻하는 거라며 내 아이들도 못하게 했다. 그런 미신이 있단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시던 그 해 즈음에 남편이 손가락을 그렇게 하면서 놀았다고 한다. 원래 어려서부터 겁이 많고 조심히 살아온 나는 시댁의 가정사까지 더해져 더욱 조심했다. 언제 닥쳐올 지 모르는 그 무엇에 겁이 났다. 무서운게 아니라 조심했다. 나는 두 아이를 낳았고, 아이들에게 어떤 불행이 닥칠까 항상 두렵다. 아이들이 뛰면서 막무가내로 놀면, 갑자기 엎어져서 피가 나는 상상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포크를 들고 다니면 갑자기 엎어져 몸의 어딘가를 찌르는 상상. 내가 과일을 깎고 있을 때 아이들이 내가 든 칼 쪽으로 덮치는 상상. 아이들이 노는 상황에서 항상 최악의 상상을 했던 것 같다. 내 상황이 안 좋으니 더 나쁜 쪽으로 상상하게 되고 겁을 먹게 되었다.


내가 지켜야 하는 것 앞에서 나는 너무나 히스테릭하다. 거기에 일이나 삶의 스트레스까지 더해지면 예민함이 하늘을 찌른다. 근데 그게 항상 아이들을 향해 있어 그게 너무 싫다. 아이들의 알 수 없는 미래보다 더 걱정되는 건, 나의 이 날카로움에 아이들이 베일까 두렵다는 것이다.


초등학생 2학년인 첫째 아이가 ADHD로 진단을 받고 상담을 받았고, 나도 같이 상담을 받았다. 생존의 스트레스와 육아의 스트레스는 나의 가정사로 인한 생채기 위에 고스란히 얹어져서, 가장 가까운 나의 아이들 앞에서 가감없이 펼쳐진다. ‘선생님, 제가 차라리 없는 게 아이들에게 낫지 않을까요?’ 아이들에게 엄마는 목숨과도 같다는 상담선생님의 말에 얼른 그 생각을 접고 지금은 나 자신을 바꾸려 몸부림치고 있다.




매사에 겁이 많다. 어떤 일이 닥칠 것만 같은 느낌. 상식을 넘어서는 경계심. 요즘은 나 자신에게 항상 얘기한다. ‘뭐 어때? 괜찮아.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먼저 걱정하지 말자. 겁 먹으면 그 ‘겁’이 너를 잡아먹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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