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중국에서

왕가위 드라마 <번화>를 보고

중국인 남편 피셜 : "응답하라 1993"

by Groovycat

1. 로맨스인지 시대극인지 판단하려 하지 마라.


중국인 남편이 너무 재미있는 중국 드라마가 있다며 추천했다. '중경삼림'의 감독 왕가위라며... 사실 남편은 중경삼림을 보지도 않았었다. 거장 감독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었다고 한다. 너무 예술적인 영화는 재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이가 들고 이제서야 고전(?) 영화들을 보고 있다고 한다.

아무튼 드라마 '번화'는 2023년 12월부터 방영된 드라마로 1993년 상하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바오(阿宝, 宝总 : 회사를 차리고 나서는 바오종으로 주로 불린다)와 그를 둘러싼 세 명의 여자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지만 그렇게 식상한 로맨스극이 아니다. 중경삼림을 보면 알 수 있다. 대충 어떤 느낌일지. 1993년의 상하이 경제를 잠깐 검색해보면 당시 중국 경제의 중심인 상하이가 어땠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상하이의 명물 '동방명주'가 완공되기 전이다. 개혁개방과 함께 주식 투자의 붐, 수입수출의 붐이 일고 빠른 속도로 변하는 중국 경제의 중심 상하이에서 일어나는 일과 사람들간의 이야기다. 남편이 왜 중국판 "응답하라" 시리즈라고 했냐면 아마도 음악 때문인 거 같다. 음악 저작권에만 천 만위안(한화 약 19억)을 썼다고 하는데 90년대에 중국 음악에 관심 있었던 사람이면 누구나 알만한 명곡들이 자주 나온다.

드라마의 분류를 굳이 하나로 정할 필요가 있나. 최근 나오는 현대물에 질린 중문학도라면, 90년대에 중국에 출장 좀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할만한 비주얼과 스토리, 내용의 깊이까지 있는 드라마라고 추천하고 싶다. 초반 3화까지의 장벽만 넘는다면 말이다.


2. 상하이 판 드라마

'범죄와의 전쟁'에서 모든 인물들이 표준어를 썼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현지인 피셜, 이 드라마는 상하이 사투리로 봐야 진짜 봤다고 할 수 있단다. 중국어를 쓴지 28년이 다 된 나는 그래도 보통화 더빙으로 봐야했다. 다음 번에 볼 땐 상하이 사투리 판으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범죄와의 전쟁'에서 시그니처가 되는 대사들은 모두 경상도 사투리다. '영웅본색'은 광동어로 봐야 그 맛이 살듯이 '번화' 역시 상하이 사투리로 봐야 그 맛이 살 것 같다는 느낌이다. 잘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상하이에 출장이나 여행으로 가본 사람이라면 다 알 수 있는 상하이 명물 거리가 주 배경이다. 그래서 드라마 방영기간에는 주 배경이 되는 황허루(黄河路)에서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는 것이 유행이 되기도 했다. 매 화마다 나오는 황허루의 휘황찬란한 배경은 우리가 의례 알고 있는 중국 불야성 밤거리를 떠올리게 한다. 상하이의 명물 동방명주, 쇼핑의 중심가 난징루(南京路), 아바오의 첫사랑의 기억이 있는 13번 버스 등 왕가위 감동 특유의 필터가 씌워진 상하이 90년대 거리는 지금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겨운 모습이다. 드라마를 보고 나서 지금의 상하이에 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3. 주인공과 주제

드라마 방영이 시작되고 중년 남자들은 다 같은 질문을 서로에게 던졌다고 한다.

'당신이 아바오라면 세 명의 여자 중 누구를 선택하겠는가?'

드라마 초반부터 남편이 여러번 나에게 물어봤다. 드라마 초반에는 너무 유치한 질문이라고 핀잔을 줬지만 드라마 후반으로 가면서 조금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내가 아바오라면 누구를 선택할까.

하지만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는 아바오의 선택이 맞았다고 생각한다. 아니, 세 여주인공의 선택이 맞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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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는 로맨스물이 아니다. 누가 누구를 더 좋아하고 어떻게 연결이 되고 그런 유치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아바오가 주인공이 아닌 세 여주인공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세 여주인공이 입체적으로 자신의 캐릭터와 서사를 쌓아가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처음에는 남주인 아바오가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실제 중국 현지인을 자주 보는 나로서는 연예인 후거(胡歌)-아바오니까 가능한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영화 '킹스맨'을 연상시키는 드라마 초반 때문이기도 하고 아바오의 일관된 비주얼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에게 부딪혀오는 사건에 내몰리지만 그것을 해결하고 맞서는 여주인공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엔 아바오의 결말보다는 세 여주인공의 결말을 더 자세히 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 제목이 번화(繁花)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뜻이지만 번화(繁华)가 아닌 화려하게 핀 꽃 '번화(繁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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