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지금까지도 유독 토요일을 좋아한다. 학교를 가는 토요일도 놀토(노는 토요일 - 격주로 학교 안 가는 토요일이 있었다)도 토요일이라면 전부 즐거웠다. 정확히는 토요일 점심시간을 반겼다. 일요일은 아빠도 출근을 하지 않았으니 온 가족이 모여 아점을 먹는 복작거리는 날이라면, 엄마랑 점심 데이트를 할 수 있다는 것이 토요일의 가장 맘에 드는 부분이었다. 토요일 점심이면 엄마도 주방 파업을 외치고 외식을 하러 나가거나, 내가 짜파게티 요리사를 자처하며 간단하게 해결하곤 했다.
그 날도 그랬다. 이제 막 하복을 입기 시작한 2006년 6월 10일, 초여름 날이다. 놀토라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 미적거리다 간단하게 눈곱만 떼고 동네 마트 푸드코트로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어느 푸드코트에서든 불패의 메뉴인 우동을 고르는 습관을 가졌으니, 그 날도 아마 우동을 먹었을 것이다. 어쩌면 꼬마우동이 함께 나오는 돈가스 정식을 먹었을는지도 모르겠다. 맛있게 점심을 먹고 나온 나의 눈에 유독 그날따라 배스킨라빈스 간판이 눈에 띄어 엄마에게 아이스크림을 사 달라고 졸랐다. 부쩍 후텁지근해진 날씨에 아이스크림콘 하나면 더위가 가실 것 같은데 엄마는 완고했다. “안 돼.”
견물생심이라고, 옆에 있던 동생도 아이스크림이 당겼는지 나를 거들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결정은 쉬이 바뀌지 않았다. 아이스크림 주제에 너무 비싸다고, 몸에 좋은 거 아니라고, 급기야는 살찐다는 이유를 붙이면서까지 절대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서로 똑 닮은 성정을 가진 엄마와 나는 각자의 서운함과 고집에 토라져 집에 돌아오는 내내 신경질을 주고받았다. 고작 아이스크림 하나 사주는 게 그렇게 아까울 일이야? 하는 어린 마음에서 비롯된 짜증이었을 테다.
늦은 오후 학원 수업을 가기 전까지, 한껏 삐진 상태로 방문을 걸어 잠그고 당시 한참 푹 빠진 <그레이 아나토미>를 보던 참이다. 문 밖에서 엄청나게 큰 ‘쿵’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나 동생이 뭔가를 떨어트렸나 보지, 하고 대수롭지 않은 마음으로 얼마나 있었을까. 이어서 기괴한 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글로 형용하기 어렵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가오나시의 소리와 비슷했다. 소리의 근원은 목욕을 하다 쓰러진 엄마의 입이었다.
앰뷸런스로 엄마를 이송하고 병원에 아빠가 당도하기 전까지 엄마의 보호자는 나였다. 중학교 3학년짜리가 보호자로서 목도한 중압감과 불안은 감히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이었다. 담당의는 이렇게 어린 애가 보호자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지 진짜 너 말고 보호자가 없니,라는 질문을 세 번이나 하고는 정신없이 울기만 하는 나를 붙잡아 눈을 맞추고 정확하게 말했다. “어머니는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심정지 상태였고, 심폐소생술을 해서 심장이 뛰고 있지만 의식이 없다. 검사를 해 보니 쓰러진 원인은 뇌출혈이고, 지금은 수술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서 중환자실로 옮겨야 할 것 같다”고. 그렇게 중환자실에 입원한 엄마는 상태가 불안정해 수술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꼭 일주일 뒤 우리 가족의 곁을 떠났다.
당시는 온통 2006 독일 월드컵이었다. 분단 독일에서 개최했던 월드컵을 통일 독일이 되어 재개최하는 역사적 의미에 대해,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팀이 2002년 월드컵의 아성을 이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 조별 예선 대진운에 대해 시끌벅적했다. 우리나라 경기가 있는 날이면 밤이고 낮이고 함성이 들려왔다. 전 국민이 응원과 환호로 한 마음이 되는 동안 인생의 최저점을 보내는 일은 썩 유쾌한 감정이 아니었다. 더구나 신경질을 가득 담아 할퀴었던 말이 엄마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였다는 사실은 만사에 분노하게 했다. 장례를 마무리하고 돌아온 날엔 프랑스와의 경기가, 경조휴가를 마치고 등교한 첫날엔 스위스와의 경기가 있었는데 엄마가 없는 집에서 여느 때처럼 축구를 보는 아빠가 미웠으며, 나의 세상은 무너져 내렸는데 하교 후 함께 스위스전 응원할 계획을 세우는 친구들을 보면서 노여움에 주먹을 쥐었다. 엄마를 보내고 가장 견딜 수 없던 것은 세상은 잔인하리만큼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돌아간다는 거였다.
월드컵을 비롯한 모든 축구 경기는 생중계를 보지 않는다. 내가 생중계를 보면 꼭 지더라구,라는 그럴듯한 징크스를 핑계로 앞세워 요리조리 피해 다닌다. 벌써 20년이 다 되어감에도 생생한 그날이 심연에 자리해서일까. 축구를 보면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새어 나와서일까. 좀 더 나이를 먹고 덤덤해지면 축구를 볼 수 있는 날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