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것
친구의 목소리가 조금 우울했다. 무슨 일인데? 하고 묻는 대신 사소한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나눴다. 끊어질 듯 말 듯 연약한 대화 어디쯤에서 친구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제 말이야.. 로 시작하는 첫 번째 이야기는 무척이나 사소했다. 사소한 이야기를 다 털어놓은 친구는 한 번 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또 이런 일도 있었어.. 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조금 전의 사소한 이야기보다는 무거웠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더 무거운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친구가 겪는 어려움에 대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딱히 없었다. 친구도 그걸 알았기에 말하는 걸 망설였던 걸테지.
예전에는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고난에 대해 듣는 것이 몹시 괴로웠다. 나의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삼키기 시작한 것 역시 내가 피하고픈 그 괴로움을 상대에게 전가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이제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고난 그 자체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지만, 고난 속에서 느끼는 고립감은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다. 서로의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 역시 이야기의 순기능이다. 그렇게 축적된 이야기 위에서 우리는 아무런 설명 없이 커다란 포옹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관계로 거듭난다.
이야기되지 않은 고민은 마음 속에 돌이 되어 하나 둘 쌓인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돌은 조금씩 마음에 무게를 더하고 바로 그 무게가 마음의 중력장을 형성한다. 돌이 많아질수록, 그러니까 마음이 무거워질 수록, 중력은 강해진다. 강한 중력장 속에서는 외부로부터 아무리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더라도 전부 엉뚱하게 휘어져 버리고 만다. 돌이 자주 담기는 마음의 소유자로서 나는 그게 어떤 건지 아주 잘 안다. 모든 걸 왜곡해버리는 마음의 중력장이 형성된 다음에도 돌이 하나 둘 계속 담기다 보면 어느 순간 뻥 하고 마음 속에 구멍이 난다. 영국남자 네 명이 달라 붙어도 메울 수 없는 구멍. 모든 좋은 것들이 다 빠져나가 버리는 마음의 구멍. 그게 바로 마음의 블랙홀이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친구의 마음을 생각했다. 커다란 돌로 가득 차 있는 마음. 고민이 이야기에 업혀 밖으로 실려나오는 걸 보며 나는 친구의 마음을 메우고 있던 뾰족하고 사나운 돌들이 친구의 입을 통해 하나 둘 바깥으로 나오는 상상을 했다. 개중에는 너무 뾰족하고 또 길쭉해서 토해내기 쉽지 않은 돌도 더러 있어서 나는 친구가 그 돌을 잘 토해내도록 도와주었다. 우리는 바닥에 나뒹구는 돌들을 보며 '우와 이게 어떻게 마음 속에 있었던 걸까?' 신기해했다.
우리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마음 속 돌 그 자체를 없애주는 게 아니라 이렇게 마음 밖으로 토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뿐일 지도 모른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친구는 마치 잊고 있던 게 생각났다는 듯 '아 맞다 그 일도 있었구나' 하고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잊고 있던 부록을 지금 막 생각해냈다는 듯한 그래서 이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말투였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아, 이게 제일 큰 이유였구나' 하고 알 수 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 할 때에는 '으레 그러한 것'에 기대어 대화할 수밖에 없다. 얕은 관계에서의 대화는 보통 전형적인 소재를 전형적으로 다루기 마련이니 '으레 그러한' 방식으로 소통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가까운 사이일 수록 우리는 관습 대신 우리의 경험에 집중해야 한다. 가까운 사이에 오고가는 대화에는 스스로는 알아차리지 못한 습관이 많이 묻어나온다.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는 순간에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고, 상대에게 화를 내지 못해 늘 자학하는 것이 습관인 사람이 있다.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방법을 몰라 늘 농담처럼 얘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은 격려를 하고 있다 생각하지만 늘 비난조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느냐, 말을 좀 정확하게 하라, 며 상대를 비난하기보다는 상대가 자주 하는 실수나 상대의 말하는 습관 등을 근거 삼아 마음을 읽어보려 노력하는 편이 낫다. 그래야 나중에 내 잃어버린 마음도 상대방이 함께 찾아줄 테니까. 아! 물론 마음을 읽어보려는 노력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에 한해서 기울여야 한다. 엉뚱한 사람에게까지 이런 노력을 기울이다가는 영혼에 상처가 잔뜩 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