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구멍

나는 그렇게 한 번도 나의 꽃밭을 돌보지 않았다

by 둥글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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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가 처음부터 구멍을 두려워했던 건 아니다. 아니, 이전엔 오히려 구멍을 유별나게 좋아하는 편이기까지 했다. 구멍에 대한 나의 대책없는 호감의 역사는 아홉살 때 처음 읽은 <어린왕자>에서 시작되었다. 사방이 꽉 막힌 상자에 작게 뚫려 있는 구멍 세 개. 어린왕자는 바로 그 구멍을 통해 자기 마음에 꼭 맞는 양을 발견해낸다.


아마도 그 장면이 내가 처음으로 접한 '낭만'이었던 것 같다. 낭만을 이해하기에 아홉살은 너무 어린 나이였을 지도 모르지만 그 장면을 보며 일렁이던 내 마음은 낭만에 대한 리액션 그 자체였다. 그 날의 체험을 시작으로 구멍은 나에게 특별해졌다. 구멍은 이 세계에서 저 세계를 들여다 보는 행위의 출발점이자 만날 수 없는 두 존재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만남의 장소였다. 나는 이 곳 저 곳에 구멍을 내는 사람이고 싶었고, 두터운 벽 한가운데에 뚫린 구멍을 겁없이 들여다보는 사람이고 싶었으며, 때로는 구멍 그 자체가 되고 싶기도 했다. 벽 이 편 저 편에 나누어 살던 두 개의 마음이 나를 통해 눈을 맞출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대학 졸업 후 입사한 IT 회사에서 나는 구멍의 시간을 원없이 체험할 수 있었다. 문과생을 찾아보기 힘든 그 곳에서 나는 기획자로 일하며 개발자와 디자이너의 사고방식을 들여다봤고, 관찰을 통해 그들의 사고방식을 하나 둘 체득해갔다. 하지만 그들을 관찰하는 것만이 나의 일은 아니었다. 그들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역시 나의 일이었다. 나는 그들이 서로를 관찰할 수 있도록 두터운 벽에 구멍을 뚫어야 했고, 그들이 서로 만나서 이야기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디자이너와 개발자는 사용하는 언어부터가 다르기 때문에 그저 지켜보거나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니, 사실 그런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럴 땐 내가 나서야 했다. 벽 이 편과 저 편에 나뉘어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하나의 이해에 이를 수 있도록 조율하기 위해 나는 구멍 그 자체가 되어야 했다. 이렇게 구멍을 들여다보고, 구멍을 뚫고, 구멍이 되어가며 10년을 일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성실하고 헌신적인 10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잠들 수 없는 밤이 점차 늘어만 갔다. 잠들 수 없는 밤이 늘어나며 나는 맨정신에도 꿈을 꾸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상하게도 항상 같은 꿈을 꾸었다. 나는 꿈 속에서 나를 본다. 두터운 벽에 매미처럼 매달려 구멍 속을 들여다보느라 온통 정신이 팔려 있는 나의 뒷모습. 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자그마한 꽃밭이 하나 있었는데 대부분 시들어 있었다. 세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맑은 개울물이 흐르고, 마침 그 옆에는 적당한 물뿌리개도 있었는데 말이다. '꽃밭이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나는 대체 뭘 한 거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른 나는 큰소리로 나에게 외쳤다. "뭐하는 거야! 꽃이 다 시들어 가잖아! 빨리 물부터 줘! 물 주는 건 잠깐이면 되잖아!" 하지만 구멍에 매달려 있는 나는 잠깐 몸을 움찔했을 뿐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꿈 속에서 내가 주로 하는 일은 매미처럼 구멍에 매달려 있거나, 무거운 공구를 들고 다른 사람 벽에 구멍을 뚫어주러 가거나, 이 쪽과 저 쪽에 나뉘어 있는 냉담한 사람들 사이를 바쁘게 뛰어 다니며 말을 전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때마다 제발 뒤를 한 번만 돌아보라고,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서 꽃밭에 물을 주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나는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갈 길을 갈 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한 번도 나의 꽃밭을 돌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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