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가 됐든 좋으니 어서 나를 좁쌀로 만들어 줘
사는 게 벅찰 땐 우주를 생각한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엄청난 우주의 광활함이나 무엇 하나 정확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우주의 우연성을 음미하다 보면 내 고민 같은 건 무척 하찮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주를 음미하는 순간만큼은 나의 생각과 나의 감정을 기준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자세에서 잠시나마 빠져나올 수 있다. 우주를 음미하는 순간만큼은 나의 절망과 슬픔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
머리 속에 우주를 담기 위해 끝없이 줌아웃을 하다 보면 나는 그저 아무 것도 아닌 좁쌀 한 톨이 되어 버린다. 나에겐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나'라는 존재가 우주적 관점에서는 지극히 우연적인 존재라는 사실이 허무하고 잔인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사는 게 벅찰 땐 저것만한 구원도 없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좁쌀이 되기 위해 노력하거나 자신이 완두콩이 아니라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끼는 좁쌀 같은 건 이 세상에 없으니까. '좁쌀이 잘못을 저질러봐야 뭐 얼마나 대단한 잘못을 저질렀겠어.' 나는 좁쌀의 힘을 빌어 나에게 조금이나마 너그러워질 수 있다.
보통은 1년에 두세 번 할까말까 한 우주에 대한 생각을 매일 했다. 구멍 너머의 세상에 정신이 팔려 정작 내 세계의 꽃밭을 돌보지 않는 나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한 이후의 일이다. 매일 식후 30분 이내에 우주에 대한 생각을 물 없이 꿀떡 삼켰다. 처방 받은 약을 성실하게 챙겨먹듯 한동안 그렇게 살았지만 이상하게도 효과가 없었다. 아무리 줌아웃을 해도, 아무리 머리 속에 우주를 담아 봐도, 일렁이는 마음의 파도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줌아웃에 내성이 생긴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약의 강도를 조금 더 높이기로 했다. 우주의 광활함과 우연함을 단순하게 음미하는 대신 우주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한 글을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다. ‘뭐가 됐든 좋으니 어서 나를 좁쌀로 만들어 줘.’ 간절한 마음으로 좁쌀을 꿈꿨다.
하루는 베텔게우스에 대한 글을 읽었다. 겨울 하늘을 수놓는 오리온 자리의 어깨별 베텔게우스는 유난히도 새빨갛게 빛나고 있어서 별자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금세 찾을 수 있는 별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별이 뿜어내는 찬란한 광채는 그 별이 곧 임종을 맞게 된다는 신호라고 했다. 그것보다 더 아이러니한 사실은 지구별에 사는 우리가 지금 이 순간 베텔게우스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베텔게우스는 지구로부터 약 600광년이나 떨어져 있어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베텔게우스의 빛은 약 600년 전에 뿜어져 나온 빛이다. 600년 전의 빛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건 600년 전 베텔게우스가 존재했다는 사실 뿐이다. 바꿔 말하면 지금 이 순간 베텔게우스가 살아있는지, 아니면 이미 숨을 거뒀는지의 여부를 알고 싶다면 얌전하게 600년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애초에 우주가 생겨먹은 게 이래. 그러니까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야. 완벽한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기죽을 건 없어. 작은 이해를 소중히 여기렴.’ 평소라면 이런 식의 응원을 해줬을 우주가 오늘은 이상하게도 아무 말이 없었다. 말 없는 우주의 안부를 살피기 위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여기 저기 매달려 반짝 반짝 빛나는 별들 밑에서 나는 한참을 외로웠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저 반짝임은 과거의 흔적일 뿐이야, 지금 이 순간 별들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어.’
밤하늘의 고독함에 마음이 데인 이후에는 주로 태양에 대한 글을 읽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태양은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이다. 누가 빛을 비춰주지 않아도 알아서 빛난다는 점이, 그러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다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그 스케일도 상상을 초월했다. 태양이 딱 1초 동안 뿜어내는 에너지로 지구상 모든 인류가 100만년 넘게 쓸 수 있을 정도라고 하니까 말 다 했지. 나는 그 어마어마한 숫자를 머리 속으로 여러 번 되뇌이며 어떻게든 좁쌀이 되기 위해 애썼지만, 그 노력 또한 수포로 돌아갔다. 태양에도 수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태양만큼은 영원히 빛날 거라고 생각했던 나에게는 태양에도 수명이 있다는 사실이, 그러니까 태양 역시 임종을 맞게 되리라는 사실이 무척 충격적이었다. 태양과 똑같은 항성 베텔게우스가 임종을 맞으리라는 건 큰 동요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어쩐지 태양의 죽음만큼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람은 죽는다.’는 명제에 비해 ‘엄마도 죽는다’는 명제를 받아들이는 게 훨씬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 아닐까.
그 날 나는 두 가지 이유에서 밤잠을 설쳤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태양 역시 죽는다는 당연한 사실 때문에 절반의 밤잠을 설쳤고, 무려 78억년 뒤의 일을 진지하게 걱정하는 내 모습이 정상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남은 절반의 밤잠을 설쳤다. 하지만 78억년 뒤에 닥칠 자신의 죽음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태양은 다시 떠올랐고, 덕분에 나 역시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시치미를 떼고 출근할 수 있었다.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한 하루 하루가 막힘없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