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랑데뷰

천연덕스러운 하루 속에서 계속되는 우주 랑데뷰 기획

by 둥글레

대학 시절, 수업이 없는 평일에는 주로 시내에서 영화를 봤다. 그 때는 일상처럼 당연했던 한적한 영화관에서의 시간이 일종의 특권이라는 사실은 회사원이 되고서야 깨달았다. 오전에 영화를 보고 거리를 걷다 보면 점심을 먹으러 쏟아져 나오는 회사원 무리에 휩쓸릴 때가 종종 있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비슷한 시간에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가 커피 한 잔씩을 들고 다시 각각의 빌딩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그들을 보며 내가 했던 생각은 딱 하나였다. ‘저 사람들, 저기 들어 앉아서 하루 종일 뭐하는 걸까?’


베텔게우스에서 출발한 600년 전 빛이 오늘 내 눈에 도착한 것처럼, 10년 전 내가 보낸 질문이 이제 나에게 도착했다. 나는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싶다. “다른 사람의 인생은 살아본 적이 없어. 그래서 나는 내가 한 일에 대해서만 이야기 할 수 있단다. 그러니 그걸 감안하고 들어줘. 나는 말이야. 10년 동안 거리 메우는 일을 했어.”


IT 회사에 다닌다고 하면 사람들은 보통 컴퓨터 앞에 앉아 깜빡이는 커서를 보며 코딩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실제로 개발자들은 그렇게 일하지만 나는 기획자다. 서비스를 출시하고 운영하는 업무를 담당한 기획자로서 내가 주로 하는 일을 한 문장으로 축약한다면 ‘다른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메우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구와 누구 사이의 거리를 메우는 일인지에 따라 구체적인 업무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 번째는 사용자와 제작팀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일이다. 기획자는 사용자들이 직접 쓴 리뷰나 후기를 보며 서비스에 대한 만족도를 가늠해본다. 자신있게 내놓은 기능인데 설명이 너무 어려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경우도 있고, 별반 기대하지 않았던 기능인데 호평을 받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리뷰나 후기는 적극적 사용자들의 강한 의견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지만, 이것만으로는 전체 사용자의 의견을 가늠했다고 보기 어렵다. 어떤 집단에서나 그렇듯 9할 이상의 사용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침묵하는 사용자의 이용 상황을 가늠하기 위해 기획자는 통계 자료를 확인한다. 어떤 화면에 가장 오래 머물렀는지, 어떤 버튼을 많이 눌렀는지, 어떤 시간대에 주로 접속을 하는지. 리뷰나 통계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 그러니까 아직 출시하지 않은 서비스에 대해서는 간혹 사용자를 직접 만나기도 한다. 기획자는 사용자에게 어떤 디자인이 가장 마음에 드는지 물어보고, 실제로 서비스를 어떤 순서로 사용하는지 지켜보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은 사용자가 어디에 서 있는지 가늠하는 과정이다. 두 대상 사이의 거리를 메우려면 먼저 각각의 대상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알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사용자와 제작팀이 만나서 끌어안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선정하는 일이다. 서비스를 출시한다는 건 결국 사용자를 만난다는 뜻이고, 더 좋은 서비스라는 건 더 많은 사용자에게 더 나은 경험을 제공한다는 뜻이다. 사용자와 제작팀이 어디에 서 있는지 가늠한 기획자는 공통의 목적지를 설정하고 그 곳으로 향하는 지도를 그린다. 이 때 기획자는 게으른 사용자의 욕망을 고려해야 한다. 제 아무리 좋은 서비스라 할 지라도 매일 산에 올라 야호를 세 번 외쳐야 하는 정도의 번거로움을 수반하는 것이라면 사용자는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용자가 기꺼이 움직일 수 있는 제한적 범위를 어느 정도 가늠한 뒤에는 그 범위 내에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제일 좋은 곳을 찾는다. 이 과정에서 기획자는 온갖 종류의 유한함과 싸우게 된다. 회사의 유한한 자원, 구현 가능한 기술, 디자인과 성능 사이의 타협, 인간이 가진 다양한 결함, 그리고 시간. 이 모든 것을 어느 정도 고려하여 목적지를 설정했다면 이제 지도를 그릴 차례. 기획자는 자신의 머리 속에만 존재하는 그 목적지를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문서화한다. 우리는 그것을 기획서라 부른다.


세 번째는 목적지로 향하는 과정에서 각 직군의 사람을 챙기는 일이다. 지도까지 그려서 손에 쥐어줬으니 다들 집합시간에 맞춰 그 곳까지 알아서 찾아오면 좋겠지만 그런 마법 같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애초에 가본 적도 없는 길을 짐작하여 그려낸 지도가 가질 수밖에 없는 결함이 있기 때문이고, 같은 지도를 손에 쥐고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같은 이해에 도달하는 것 역시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획자는 목적지로 향하는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거리를 좁힌다. 실제 행로와 지도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지도에서 표현하려 했던 것과 사람들의 이해 사이의 거리를 좁힌다. 이 기호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물어보는 사람에게는 친절하게 대답해주고, 지도를 거꾸로 들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바로잡아준다. 고된 행군에 지친 사람들은 가끔 찾아와서 묻는다. 정말 이대로 가면 이 곳에 도착할 수 있냐고, 정말 이 지도를 믿어도 되냐고. 기획자는 자신이 만들어 낸 지도의 결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자신의 불안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그러니 불안을 삼키고 이렇게 말할 수밖에. “우리, 가는 데까지 열심히 가 봐요.” 상대의 경향을 생각해서 그의 불안을 덜어줄 수 있는 말을 몇 마디 덧붙이기도 한다.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당신이 있어 힘낼 수 있어요.”라 덧붙이고, 낙관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잘 될 거예요!”라 괜히 큰 소리를 치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듯 이것과 저것 사이를 오가며 거리 좁히는 일에 매진하다 보면 꼭 우주여행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언어는 물론, 중력과 궤도마저 다른 행성 사이를 오고 가며 그들 사이의 랑데뷰를 기획하는 기분이랄까. 매 순간 팽창하는 우주,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에게서 멀어지고만 있는 우주에서 이 곳 저 곳을 오가며 랑데뷰를 기획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이나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건 그 잠깐의 마주침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겠지. 그 잠깐의 이해가 너무 감동적이었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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