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둥글레 Dec 31. 2018

소화불량에 걸린 보아뱀

나랑 같이 약국에 가요

요즘은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같은 기분이에요. 더부룩한 속이에요. 조개는 낯선 게 자기 안으로 들어오면 그걸 꼭 껴안아서 진주로 만들잖아요. 저는 조개도 아닌 주제에 조개 흉내를 냈나봐요. 꼭 삼키고 보니 코끼리네요. 


속이 더부룩해서 소화제 사러 약국에 갔더니 모자한테는 소화제 안 판다나요? 나는 모자가 아니라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고 지금 속이 너무 거북하니까 소화제를 주든지 바늘로 손을 따달라고 (전 손 있는 보아뱀이에요) 했지만 아저씨는 그냥 별 이상한 모자 다 보겠다는 듯 혀를 내둘렀어요. 


만약에 어린왕자 같은 게 나타나서 말예요. 그 동안 아무도 보지 못했던 내 안의 코끼리를 갑자기 짠 하고 발견해준다 하더라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거예요. 내 안의 코끼리가 어린왕자 덕에 햄스터로 변한다든가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요. 뭐, 데이비드 카퍼필드쯤 되는 어린왕자면 모르겠지만. 


그래도 말예요. 둘 다 바보취급 받는 한이 있더라도 나랑 같이 약국에 가서 얘가 보기에는 모자처럼 보여도 속엔 코끼리를 품은 진짜 보아뱀이 맞다고 속이 보이는 보아뱀과 속이 보이지 않는 보아뱀 그림 두 개를 들고 목에 핏대 올려가며 내 편 들어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요. 


정말 중요한 건 내가 소화제를 살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나의 멍청한 방황에 장단을 맞춰줄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인 것 같기도 하고요. (아니면 내가 누군가의 멍청한 방황에 장단을 맞춰줄 수 있느냐 없느냐) 뭐, 어쨌든 소화불량은 힘들어요. 그래도 잘 참으면 코끼리만한 진주가 만들어질 지도 모르니까 힘내야지. 에.. 결국 만들어지는 건 코끼리만한 똥이려나? 

매거진의 이전글 어떤 여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