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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글레 Dec 30. 2018

어떤 여관

옥탑방(<어차피, 결국엔>)과 1층방(<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관이 있어요. 예전부터 좋아했던 건 그 여관의 옥탑방이에요. 전망도 좋고, 사람도 적거든요. 방바닥에 늘어붙어 양철지붕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고 있자면 내가 굉장히 낭만적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습니다. 한밤 중에 빗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하거나, 새벽녘 바람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면서 늘어진 그림자 같은 시간을 보냈어요. 사람 냄새 나지 않는 그 곳에서 나는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사람들을 상상했어요. 그러다 보면 사람들이 보고 싶어지죠. 뭐, 그래도 불쑥 전화를 하거나 내 방에 사람을 초대할 용기는 없었어요. 그래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수신인을 특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의 편지 첫 문장은 이런 식이었어요. <안녕 비 오는 화요일 이 거리를 지나는 당신> , <뭐해요? 밤이 깊었는데 안 자고>. 전부 애매하고 모호한 데다가 어중간하기까지 한 문장들이죠. 편지를 다 쓰면 비행기를 접어 여관 밖으로 날렸습니다. 답장을 받아본 적은 없어요. 기다린 적도 없고요. 비행기에 싫증이 나면 학을 접었고요. 비가 오는 날엔 특별히 종이배 같은 걸 접기도 했어요. 


세상에는 정말 여러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어요. 그래서 세상이 시끄럽고 또 아름다운 거겠죠. 어떤 사람들은 이 방 저 방을 옮겨다니며 계절에 따라 변하는 모습을 마음에 담았어요. 어떤 사람들은 자기 방에는 도통 들어가지 않은 채 식당과 정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어요.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버릴 엄청난 기세로 말예요. 나는 내가 쌓아올린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늦여름의 어느 날, 옥탑방 문을 열고 나왔어요. 높은 계단을 하나하나 꾹꾹 밟아가며 조심스레 내려왔죠. 어리둥절한 세상이더군요. 나는 내 방에서 듣고 보던 것보다 생생하고 강렬한 세상의 모습에 잠시 정신을 잃었어요. 그리고 이내 매료되었죠.   


그래서 나는 1층에도 방을 하나 더 잡았어요. 1층방에서 보는 세상은 옥탑방에서 보는 세상과 전혀 달랐어요. 눈에 보이는 것들이 완전히 달라졌거든요. 1층방에서는 무거운 가방을 짊어진 사람의 구부정한 등이 보여요. 옥탑방에서는 온통 똑같이 생긴 사람들의 정수리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말예요! 게다가 비를 느끼는 방법도 달라졌어요. 빗소리를 듣고 비냄새를 맡으며 뒤늦게 비를 알아차리던 내가 이제는 <어? 비 온다!>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비 오는 걸 빨리 알아차리게 되었어요. 먹던 사탕을 누나에게 빼앗겨 울음이 터진 꼬마가 저기 지나가네요. 나는 창문을 열고 말을 걸어요. 작고 반짝이는 조약돌을 손에 쥐어 주거나 한참을 조물거려 말랑말랑해진 귤을 까서 입에 넣어주지요. 꼬마는 채 마르지 않은 눈으로 나를 보며 싱긋 웃고 이내 나를 스쳐 지나가요. 그 뿐이죠.   


모든 사람이 1픽셀의 점으로 보이던 옥탑방과는 달리, 1층방에서는 사람들의 모습을 훨씬 높은 채도로 볼 수 있어요. 가끔은 창문을 열고 사람들에게 말을 걸기도 하죠. 지금 이 생활이 재밌기는 하지만 옥탑방을 아주 잊을 수는 없어요. 그래서 저는 아직도, 여전히, 언제나처럼, 엘리베이터도 없는 그 여관의 옥탑방과 1층방 사이를 헥헥대며 왔다갔다 한답니다.  


그 옥탑방의 이름은 <어차피, 결국엔>, 1층방의 이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상처를 받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삶 혹은 사람과 유지하고 있으면 모든 게 균질하게 느껴집니다. 다 아무래도 좋을 것으로 느껴지죠. 안전한 머리 속에서 이런 저런 상상을 하며 나만의 왕국을 만들기도 해요. 이렇게 <어차피(헤어지고), 결국엔(죽는 인생인데)>으로 사람들을 1픽셀의 점으로 보면서 사는 인생이 하나 있습니다. 반면에 한 걸음 다가가는 인생도 있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맞은편을 응시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 무서워지는 거예요. 상실이 두렵고, 상처가 두려워서. 그래도 한 번 더 다가가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아요, 두 번째가 훨씬 낭만적인 거. 그런데 저는 여전히 옥탑방과 1층방을 헥헥대며 왔다갔다 할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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