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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글레 Dec 29. 2018

순간의 열쇠

그 순간 속에서, 혹은 그 순간을 재현하며


한 달 전 쯤의 일이다. 회사 이삿짐을 꾸리며 책상 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짐승처럼 일할 때의 다이어리를 찾았다. 거기엔 매일 매일의 퇴근 시간이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는데 늦을 땐 새벽 세네시, 아무리 빨라도 열두시더라. 주말도 없이 일할 때였고, 저녁이 있는 삶보다는 저녁을 잊은 삶을 살던 때였다. 과도한 자의식 탓에 여간해서는 물아일체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나로서는 '일을 한다'는 명목으로 나를 내려놓고 무언가에 몰두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 때는 몰두할 무언가가 있다는 것 자체가 위안이었다. 

처음 몇 년 간은 나 스스로도 그 시간이 의미 있고 소중하다 생각했으나, 나중 몇 년은 그것이 나의 적극적 선택이라기보다는 소극적 도피에 가깝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었다. 버거운 장애물을 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는 과정도 좋았고, 마침내 장애물을 넘고 난 뒤에 느끼는 성취감도 좋아서, 계속 그렇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큰 착각이었다. 당시 내 노력의 근간은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마음이었기 때문에 무언가 의미있는 것이 축적되어 간다는 느낌보다는 밑빠진 독에 물 붓는 느낌에 가까웠다. 자기 만족이 아니라 타인의 만족을 위한 노력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그 때 많이 느꼈다. 타인의 만족 여부는 내가 측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것을 목표로 삼는 노력은 나를 지치게만 할 뿐이다.  

바쁘게 지내다가도 잠깐 숨 돌릴 틈이 생기면 '이렇게 살아도 좋은 걸까?'라는 생각을 어김없이 했다, 그렇다고 그 때의 인생이 되게 싫었냐 하면 뭐 그렇게까지 싫지는 않았다. 인생이 세 개 정도 있다면 그 중 하나는 그렇게 미친 듯이 일하는 인생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으니까. 다른 하나의 인생은 이 곳 저 곳 여행을 다니며 글을 쓰고, 마지막 하나의 인생은 친구들과 유치하게 놀기만 하는 인생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모두에게 그렇듯, 나에게 주어진 인생은 단 하나뿐이지. 저 세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어떤 인생을 선택할 지는 몰라도 일로 가득 차 있는 인생을 선택하지 않으리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편안하게 있을 때 사람들은 행복함을 느낀다. 껍데기를 뒤집어 쓰고 있는 한 우리는 소통할 수 없다. 가족, 그리고 친구와 함께 할 때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함은 어쩌면 껍데기를 벗어던지며 느끼는 해방감의 다른 이름일 지도 모른다. 나는 쓰잘데기 없는 껍데기를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심지어는 그 껍데기를 벗어 던지는 것에도 두려움을 많이 갖고 있다. 뭐, 그 두려움 자체가 문제라고,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너는 너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솔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그것도 문제해결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방식의 해결은 현재의 존재방식 그 자체를 문제시하는 것이기에  급진적이고 획기적이지만, 실제로 해결까지는 너무나 요원하며 그 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남긴다. 



 
나는 쓰는 게 참 좋다. 쓰고 싶은 걸 쓰고 싶은 만큼 쓰고 싶은 방식으로 쓰고 있을 때야말로 아무런 걱정 없이 솔직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나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솔직할 수 있게 된다면야 그게 제일 좋겠지만,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있든 활짝 열려 있는 내 모습은 도무지 상상되지 않는다. 나는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닫혀 있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활짝 열리고,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마음을 숨기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솔직할 수 있다. 언제나 활짝 열린 태도로 한결같이 솔직한 사람이 되기는 힘들겠지만, 활짝 열리고 솔직할 수 있는 순간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닌가 싶다. 그 순간 속에서, 혹은 그 순간을 재현하며 살아가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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