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만으로도 빛나지만 그걸로는 부족해요

사람은 죽어서 삶의 흔적을 남긴다

by 그로브제이

내가 살아서 누군가도 살 수 있다

'반짝반짝 김예원'이라는 책을 낸 적이 있다. 나의 실제 경험담에 각색을 더해 쓴 소설인데 잘하고 싶은 마음만 앞선 지금 보기엔 약간 부끄러운 책이다. 어쨌든 그 당시의 나는 모두가 존재만으로도 빛난다고 생각했기에 그 주제를 위한 책을 냈던 것이다. 물론, 모두가 존재만으로 충분하다. 내가 없어지면 슬퍼할 누군가가 분명히 한 명쯤은 있을 것이다. 그게 본인이 알지 못하는 지구 반대편의 '누구'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타인을 위로하기 위해 썼는데 오히려 스스로에게 많은 위로가 됐다. 그런데 지금은 그 '위로'를 돌이켜보니 현실을 회피하고 더 나은 삶을 살지 못하는 나를 합리화하려고 했던 걸까, 하는 의문이 든다.


최근에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심리학자 '아들러'의 이야기를 한 철학자와 청년의 문답 형식으로 쉽게 풀어둔 책이다. 여기서도 사람은 행위가 아닌 존재 자체로 기뻐해야 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자네는 지금 타인을 '행위'의 차원에서 보고 있네. 즉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가' 하는 차원에서만 말이지. 그런 관점으로 생각하면 자리에 누워만 있는 노인은 주변 사람에게 폐만 끼치고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몰라. 하지만 타인을 '행위'의 차원이 아닌 '존재'의 차원에서 살펴야지. 타인이 '무엇을 했는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존재하는 그 자체를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는 걸세.
- 미움받을 용기 1권 중에서

철학자의 이 말에 청년은 위선이라고 맞받아친다. 부모님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이야기, 도서관 사서인 자신의 진부하고 따분한 하루를 이야기하면서 누구라도 '나'를 대신할 수 있는데 어떻게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입증할 수 있느냐고 묻고 있다. 그러자 아이러니하게도 철학자는 '다른 사람과 수평적인 인간관계를 맺으라' 라고 말한다.


결과물이 아니라 내 삶의 흔적이자 증거를 남겨라

어쩌면 우리는 '결과'에 너무 집착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잘 해서' 혹은 '돈을 많이 벌어서' 다른 사람을 돕고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 의지로 여기까지 왔다. 그게 내 좁은 세계관 속에서는 가장 좋은 일이었다. 아프리카 오지에 학교를 짓고 교육의 기회를 나누며 늘 베푸는 삶. 이 삶을 이루어야만, 그러니까 열매를 맺어야만 결국 목표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삶만이 행복할 거라고 믿어왔다. 이런 생각에 현재의 삶을 깔보고 무시했다. 도저히 살 수 없는 미래에 도취해 살면서 '언젠가는'이라는 말을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되뇌었다.


어쩌면 오지 마을에 학교를 짓는 일을 죽을 때까지 해내지 못할 수도 있다. 수백번도 넘게 꿈꿨던 이상적인 삶을 이뤄낼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가능성도 당연히 있다. 그렇다면 결과내지 못한 삶은 비난받아야 할까? 여기서 우리는 '열매'라는 단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나무가 열심히 일을 해낸 결과로 달콤한 열매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 맞춰 우리는 열매를 결과물, 눈에 보이는 어떤 목적의 달성으로 넘겨짚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열매를 '삶의 흔적'으로 바꾸면 어떨까? 책에서 철학자가 말했던 '수평적인 인간관계'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책은 수직적인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내 존재 가치를 어떻게든 입증하려고 하지만 수평적 관계에서는 증명이 필요없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결과물은 처음부터 필요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결과란 삶의 흔적을 남기다보면 따라오는 부수적인 것일 뿐,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흔적을 남기며 살아야할까? 더 많은 성과가 아니라 같은 자리에서 사랑하려 애썼던 흔적 아닐까. 누군가를 돕기 위해 위로 올라가지 않고, 오늘의 자리에서 같은 눈높이로 곁에 머물렀던 시간들 말이다. 누군가의 짐이 아니라 쉼이 되어준 순간들 사이로 내가 흘려보낸 사랑이 졸졸 흐른 흔적 말이다. 사랑은 의도하지 않아도, 계산하지 않아도 그런 방식으로 세상에 남는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무는 열매를 맺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 뿌리내리고, 계절을 견디며, 햇빛과 비를 받아내는 동안 열매는 조용히 따라온다. 그 나무는 작은 동물들에게 쉼터를 내어주고 때로는 열매를 떨어뜨려 먹을 것을 제공해줄 것이다. 나무 아래에서는 키작은 풀들이 자라고 흙 속에서는 온갖 생명이 꿈틀거릴 것이다. 나무가 흘려보낸 사랑의 흔적은 그렇게 남는다.


묵묵히 할 일을 하는 나무처럼 나도 이제는 그저 묵묵히 사랑하며 살고 싶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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