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시작한 청소
나는 청소를 하기엔 고귀하다고 생각했다. 이를 증명하듯 손에 물을 거의 묻히지 않은 채 살았다. 캥거루 족으로 삼십삼 년째 살고 있으며 집에는 청소해 주시는 이모님이 오셨다. 지식 노동자 휴지통과 책상은 청소부가 항상 치우고 닦아줬다. 하지만 카페일을 시작하면서 청소는 내 일이 됐다. 막상 하니 자존심이 상했다. 번듯하게 정장 입은 사람들이 식기구에 오물을 묻힌 휴지를 내버려 두고 가거나, 모르는 사람의 침이 뭍은 빨대를 정리하고, 바닥에 흘린 쓰레기를 주워야 할 때, '나도 빳빳하고 비싼 옷을 입으면서 비싼 음료를 마시던 사람이었는데'라고 생각했다. 어질러진 컵들과 쟁반을 치우면서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라는 현타가 자주 왔다. 그래도 이런 생각을 해봤자 나만 속상하니깐 청소를 할땐 ‘점심엔 뭐 먹지?', '주말엔 뭐 하지' 등 다른 생각을 하면서 얼렁뚱땅 빨리 마무리했다.
청소가 싫어서 카페 일은 오래 못하겠다 생각한 날이었다. 매장에서 가장 직급이 높은 점장이 개수대 앞에서 열심히 앞머리를 흔들고 허리를 굽혀가며 무언가 닦았다. 뻘쭘해서 ‘뭐 도와드릴까요?’라며 빈말을 건넸다. '여기 하수구에 낀 검은 때를 어떻게든 없애려고요'. 두 달 넘게 함께 쓰는 개수대였는데 내 눈엔 보이지 않던 검은 때가 점장 눈엔 보였나 보다. 물이 닿는 싱크대엔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물 곰팡이가 빡빡 긁는다고 해결이 되나 생각했다. 그래서 옆에서 멀뚱멀뚱 구경만 하다가 말았다. 다음날 검은 곰팡이가 박멸한 뽀얀 하수구를 마주했다. 그날 퇴근길 점장은 왜 굳이 곰팡이 제거 작업을 직접 했을까 되뇌었다. 나라면 신입 직원이나 매일 오는 청소 외주업체에게 시켰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춘분으로 절기가 접어든 주말, 봄을 맛보러 두릅 따러 농장에 갔는데 농부들이 청소가 한창이었다. 예년보다 빠르게 더워진 날에 꽃이 피면서 미처 겨울 도구와 방한용품을 다 정리 못한 농부들의 마음은 급했다. 모두가 쉼 없이 밭의 돌을 치우고, 겨우내 덮고 있던 잎섶을 정리하느라 바빴다. 봄맞이를 위한 청소 때문에 점심 때가 돼서야 겨우 마주 앉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뭘 모르는 농부들은 자본주의와 4차 산업혁명시기에 힘들게 산다. ‘요즘은 청소 기계나 사람을 고용해서 시키면 되지 않잖아요!’라고 말했다. 근데 농부는 '청소하는 사람이 결국 그 땅의 주인이야. 내가 청소해야 농번기 때 땅의 어디가 어떻고, 도구가 어디에 있고를 다 알아서 밭을 가꿀 수 있어'라고 말했다.
점장이 우리 매장에 발령 왔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방 뒤편의 수납장과 창고를 정리한 일이었다. 우리 매장은 매일 손님은 늘어나는데, 직원은 모자라 항상 정신없이 바쁘다. 근데 휴게시간에도 쓰지 않는 물건을 솎아 내고, 먼지 쌓인 곳을 쓸었다. 너무 바쁘니깐 손님에게 보이지 않는 공간은 먼지나 쓰지 않는 물건들이 쌓였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 공간들을 청소 하지 않아도 잘 살았다. 근데 점장은 굳이 그 공간의 물건을 확인하고 정리했다. 깨끗하고 넓어진 공간이 좋긴 했는데 당시엔 그 청소에 내가 동원되지 않아서 다행이고 이를 혼자 한 게 대단하단 생각뿐이었다. 근데 일 년 치 농사를 맞이하기 위해 봄청소를 하는 농부와 이야기하고 나서 점장님이 주말 내내 생각났다.
우아하고 고귀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좋은 집을 살고, 예쁜 옷을 입고, 비싼 것만 먹고 싶으니깐. 근데 자주 출근하기 싫어서 어질러진 방에 드러누워서 흑흑거렸다. 똑똑한 척 고귀한 척했을 뿐 주변 정리정돈도 제 앞가림도 서툰 사람이었다. 그게 딱 3개월 전 일이다. 요즘 ‘카페일은 어때?’ 라고 질문을 받는다. ‘청소를 좀 잘해서 우아한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어’ 라고 말한다. 설렁설렁하던 행주질을 쓱싹쓱싹 했을 뿐인데, 애벌애벌 하던 설겆이를 반짝빤짝하게 닦아 식기 세척기로 넣을 뿐인데, 손님이 바닥에 흘리고 간 쓰레기를 빠르게 줍고 치웠을 뿐인데. 이 습관이 일상에도 녹아들면서 레벨업 됐다. 일어나서 이불을 개기고, 먹고 난 다음 바로 설거지를 하고, 벗은 옷을 바로 개기고 서랍에 넣는다. 내가 가진 것이 어디에 있는 지 알고, 반짝반짝 윤기내 닦는 일. 이제 정리된 내 삶에 무엇들이 심어지고 꽃 피울지 기대된다. 다가올 계절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