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호랑이가 질주하는 삶을 살고 싶어요
지난가을엔 취집을 결심을 했다. 갑자기 취업 준비를 하다 말고, 시집을 가겠다고 생각한 건 커리어에 답이 안보였기 때문이다. 영업 직무를 해보고 싶었는데 잘 안 됐다. 정확히는 연봉을 5천 이상 주는데, 세일즈를 할 수 있고 어느 정도 브랜드도 알려진 곳에서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커리어우먼도 꿈이었지만, 압구정 아들 둘 엄마도 꿈이었기 때문에 커리어우먼은 20대로 마무리 짓고 삼십 대는 아들 둘 맘을 할 작정이었다.
그래서 부와 명예를 가진 남자와 잘 지내보려고 노력했다. 어떤 남자는 대단한 사모펀드를 다녔고, 누군 우주선을 만들었고, 누군 몇백억 투자를 받은 대표였다. 근데 대단한 상대를 만날수록 어쩐지 내가 상대적으로 초라해졌다. 반짝반짝 빛나는 과학과 금융 산업의 꼭대기에서 24시간을 전력질주 하며 효율과 성과의 최고치를 달리는 모습은 나의 일상과 너무 대비됐다. 그래도 그와 어울리는 여자가 되려고 비싼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과거 이야기, 주변의 잘난 친구들을 이야기했다. 그때마다 내가 거북하고 한심했다. 나중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웃기만 했지만 하고 싶은 재밌는 이야기가 많았다. 주말에는 농장이나 시장에서 농부와 텃밭 친구들과 계절과 채소들을 관찰한다고, 마르쉐 시장에서 야채를 파는데 회계 장부나 수익률 계산 없이 하고 있다고. 시장에서 번돈으로 다시 장보는데 탕진하고 있다고. 금융업의 셈법으론 비효율적인 선택, 에러값이 뜨는 함수 같지만 말과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몸과 마음으로 배우는 시간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근데 못했다.
그즈음 주말, 마르쉐에서 장사를 하다 손님이 빠진 틈에 생각이 많아졌다. 2년간 내 팔자가 왜 계속 꼬이는지 심난했다. 그때 농부가 물었다.
"배추는 연애 안 하니?"
"해야죠! 올해는 연애하고 이제 결혼할 거라 남자 만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제 꿈은 떡두꺼비 같은 아들 둘 낳고 사는 압구정 돼지 엄마거든요"
찬우물 농부는 사주 보기가 취미다. 이미 첫 만남 때부터 생년월시를 물어봤고, 대강 사주를 읊어 줬지만, 내가 사주를 믿지 않아서 그냥 흘려들었다. 근데 도통 팔자가 막히는거 같아서 “저 남편 덕은 어떻게 되나요”라고 물어봤다.
'풉... 집에서 살림? 네 사주를 요약하자면 검은 호랑이가 질주를 하는 형상이야. 아휴 이 사주팔자가 집에서 살림이라니..네가 괜히 종일 산을 타고, 풀마라톤을 완주하는 게 아니야. 네 팔자가 그럴 팔자야'
자기가 자기 팔자를 꼰다는 말은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는 것,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 아닐까. 난 팔자나 운명을 믿지 않는다. '인생은 노력과 의지로 하루하루 살아가면 원하는 내가 만들어지는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날 농부의 야매 사주는 믿고 싶었다. 검은 호랑이가 질주하는 팔자라니. 누가 뭐라든 좋아하는 것에 온 마음을 다 쏟아 무아지경이 될 때 행복했다. 부모님이 '딸아 제발.. 부탁이다', 친구들이 '배추야.. 왜 그래..ㅠ'라고 해도 '뭐 어쩌라고, 내가 재밌다는데 뭔 상관이야' 하면서 후회 없이 무언갈 즐겼다. 그래서 지금처럼 꿀멍은 벙어리처럼 웃기만 하면 화병이 날 거 같았다.
그 맘 때즈음 이전 회사 동료 샌더와 연락이 닿았다. 세일즈에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었고, 주변 동료와 CEO 인정을 받는 친구였다. 그와 통화 내내 마케팅은 하기 싫고, 세일즈는 아무 데도 안 받아 준다고 징징거렸다. 투정을 듣던 샌더가 물었다. "근데 너 정말 세일즈 하고 싶은 거 맞아? 그럼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데서 시작해 봐, 사실 세일즈란 게 연봉 내려놓으면 할 땐 진짜 많아. 문제는 못 내려놔서 그렇지. 근데 넌 세일즈 잘할 거 같아" 우습게도 그 통화를 끝내고 내 상황과 목표를 단순하게 봤다. 직장인으로 7년 내내 나는 인생과 커리어를 너무 '깊고', '오래', '진지'하게 생각했다. 계획도 정말 철저하게 쌓았고 목표도 디테일하게 쌓았다. 일을 잘하고 싶어서 야근, 주말 할 것 없이 일 생각을 계속했다. 자주 행복했지만 긴 번아웃과 난독증도 겪었다. 이젠 다른 방식으로 커리어를 접근해야 했다. 그래서 지난 7년과는 다르게 단순하고 쉽게 행동하기로 했다.
지금 '세일즈'를 하고 싶으니깐 '세일즈'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럼 어디서 세일즈를 시작하면 좋을까. 우선 잘 팔려면 좋아하고 잘 아는 걸로 시작하는 게 좋은데, 소비를 잘하지 않는다. 평소에도 환경단체 멤버처럼 탈소비를 주장하고, 물건보다는 경험에 소비를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인지라 뭘 하나 사도 한 달, 1년 생각하고 산다. 근데 딱 한 브랜드, 기꺼이 소비하던 브랜드가 있었다. 회사원으로 머리굴리고 회의가 힘들때 마다 자주 생각했던 게 첫번째 ’그냥 카페처럼 단순 작업에 몸 쓰는 일하고 싶다‘, 두 번째로는 '그냥 룰루레몬에서 옷이나 팔까'였다. 룰루레몬 매장에 주말마다 신상을 확인하러 가서 제품 설명서를 보곤 '내가 더 잘 쓰겠다'였고, 직원들의 세일즈를 들으며 '내가 더 잘 팔겠다'였다. 그래서 궁금했다. 내가 정말 잘 팔지. 무엇보다 2년 내내 회사를 다니면서 세일즈를 해보고 싶었고, 1년 동안 야채장사를 하면서도 판매를 더 잘하고 싶다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해보기로 했다. 목표물을 발견한 검은 호랑이처럼 질주하기로 했다. 주변의 다른건 다 무시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