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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추도사 Aug 16. 2024

갈아엎고 싶은 마음

농사를 잘 짓는 법이, 인생을 잘 사는 법

나는 내 텃밭이 싫다. 올해 처음 시작한 농사지만 이따금씩 밭에 갈 때마다 어쩌다가 이지경이 됐는지 스트레스가 쌓이고, 꼴 보기도 싫어서 ‘다 갈아엎어 버리고 싶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바로 호미를 들고 행동한다. 텃밭 농사 신입 6개월 차, 매 달 이 짓을 반복하고 있다.


이번 봄, 남들보다 늦게 농사를 시작해서 급한 마음에 일단 호미로 땅을 갈아엎고 있었다. ‘지금은 감자와 상추를 심으라 하니 빨리 갈아엎고 일단 심자. 아, 바질도 심어야지. 내 밭에만 없어. 잡초들 다 태워버리고 싶다' 생각하면서. 그때, 농부가 와서 말했다. “지금 난도질하고 있는 거 잡초 아니라 부추야”, “다른 텃밭은 부추가 잘 안 자라서 못 먹는데, 넌 부추가 이리 잘 자랐는데도 그걸 다 갈아엎냐” 잡초인지 부추인지를 뜯어다 먹으니 쓰고 아삭한데 단맛이 돌았다. "농사의 기본이자 시작은 우선 밭에서 수확할 수 있는 것을 분별하고, 그걸 감사히 먹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게 땅에 대한 예의라며.


농부가 참 맞는 말을 했지만, 나도 얼른 감자를 심는 미래로 향하고 싶었다. 지금 텃밭에는 미래가 없다. 그래서 부추를 갈아엎었다. 그리고 다시 분노의 삽질을 하는데, 지나가는 아주머니가 말했다. "어머, 지금 파고 있는 고랑에 미나리가 천지네, 이 땅에서 난 미나리 정말 맛있는데" 미나리가 맛나든 부추가 달콤하든 말든 지금 내 눈엔 한낱 잡초일 뿐. 그것들 때문에 미래의 감자 먹을 계획이 틀어질까 봐 열심히 호미질을 하며 텃밭 리셋을 진행했다.


요즘 회사 면접을 보면 공통적인 평가가 ‘다양한 일을 많이 했네요’라는 것이다. 면접자가 최대한 긍정필터를 씌워서 나의 커리어를 요약한 문장이다. 마케팅을 하다가 업무가 지겹고 한국 노동시장이 환멸스려워 갑자기 미국 MBA를 준비했다. 그러다 GMAT점수 못 맞추고 두뇌의 한계를 느끼며 퇴장하고. 또 세일즈도 하고 싶어서 몇몇 회사를 다녔지만, 또 어딘가 맘에 들지가 않았다. 무의미한데 무한대로 열리는 아이디어 회의, 새벽까지의 야근, 뻔하고 성장 없는 직군, 피드백을 빙자한 지적. 버티면 성장한다지만, 나를 갉아 먹는 건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나은 곳을 찾으려고 부딪쳐 봤는데 맘 놓일 곳을 찾지 못했다. 지난 2년간 뚜렷한 커리어 성과를 얻지 못했고, 아득히 멀어져버린 옛 커리어도 별볼일 없어져, 빈털털이가 된거 같다. 정말 앞으로 어찌, 무얼하며 살아야 할까.


체감온도 40도가 되는 날, 오랜만에 텃밭을 확인하러 갔다. 역시나 개판이었다. 잡초가 밀림을 이뤄 호랑이가 나올 것 같았다. 농부에게 오늘 기계 예초를 해달라고 졸랐다. 농부가 일단 밭에 먹을 건 다 수확했냐고 물었지만, 싹 갈아엎고 빨리 가을 농사의 꽃 대파랑 무를 심고 싶다고 했다. 농부는 어차피 너무 더운 날씨라 파종도, 예초도 때가 아니라 했다. 농부가 일하지 말라고 하니 가벼운 마음으로 이웃인 광식 씨 텃밭을 구경하러 갔다. 광식 씨 텃밭엔 탐스러운 것이 많았다. 올망졸망하게 열린 토마토와 쭉쭉 뻗은 대파를 만지며 계속 군침을 흘리니 배추네 밭에도 뭐가 분명 있을 거라 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하지 이후 밭을 내동댕이 쳤기에 여름농사는 진즉에 망했다. 그래서 입추에 작물의 목을 호미질로 댕강 부러뜨려놓았다. 그런데 광식 씨가 내 텃밭 잡초를 헤치더니 "여기 실한 가지가 있어요" 외쳤다. "빨간 고추도 있네". 설마 했는데, 탐스러운 가지와 새빨간 고추가 있었다. 땡볕을 맞으며 가지 모종을 심었을 땐 언제고 또 갈아 엎을 생각만 하다니. 가지와 고추 그리고 밭에게 미안했다.


올 상반기 농사는 망쳤지만, 정확히 안 것이 있다. 갈아엎는 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방법이 아니다. 우선 밭에서 챙길 수 있는 열매와 채소를 감사히 거둬 남기지 않고 잘 먹을 것. 그리고 나서 포기 할 작물을 정리하고 새 작물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 그런 농부가 다음 단계에서도 농사를 잘 짓는다. 밭에 갈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그래도 매번 땅은 못난 주인에게 삶의 중요한 가르침을 넌지시 알려줬다. 부끄럽지만 다음 주에는 밭을 깡그리 예초할 예정이다. 밭은 그리 됐지만 대신 요즘 책상에 앉아서 이전과 다르게 일한다. 무작정 이력서를 쓰기보다는 내가 타고난 것, 잘하는 것, 잘 못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분별한다. 그리고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서 가진 것을 십분 활용하여 다음단계에서 어떤 것을 하고 싶은지 궁리한다. 빈털털이 인줄 알았는데, 가진 재능도 이뤄낸것도 많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을 잘 할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커리어를 잘 꾸려간다는 건 뭘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갈아엎고 무작정 나아가면 안된다는 걸 분명히 안 여름이다.

잡초로 뒤덮힌 나의 텃밭과 그속에서 잘 자란 토실토실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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