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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라는 길 위에서

1년이 훌쩍 지나, 윤슬이 배추에게 보내는 네 번째 편지

by 배추도사

*참고: 해당글은 글쓴이의 블로그(https://blog.naver.com/yoonik_)에서 직접 읽는것이 더 좋습니다. 행간과 여백 등 모바일 화면의 모든 것을 고려해 쓴 글이기 때문입니다. 댓글도 블로그에 남겨주면 좋습니다.


언제나 빛나는 글쟁이 배추에게


배추, 반가운 편지 고마워요. 2024년을 잘 마무리하기 위한 깜짝 선물 같아요. 저도 은연중에 배추와의 편지를 깊은 창고에 넣어두고는 숙제처럼 보관하고 있었는데… 올해가 끝나기 전 그 숙제를 해내면 마음이 엄청 속시원하겠죠?


이별을 했군요. 배추가 이별했단 말을 듣고 어떤 말을 전해야 할지 커서만 무한대로 깜빡이는 한글 파일의 하얀 여백처럼 머리가 새하얘졌어요. 힘내란 뻔한 말 대신 이별은 헤어짐이 아니라 다른 두 개의 별이 되어 각자 빛나는 과정이라는 개똥철학을 전하고 싶어요.


사실 저도 최근에 이별을 했어요. 전 사람이 아닌 글과 이별을 했답니다. 글은 이별하고 나서야 써지는 것이라고 배추가 말했는데, 글이랑 잠시 이별한 사람은 대체 뭘 써야 해요? 아, 돈을 썼군요.


10년 동안 글이 저의 길이라고 믿은 채 살아왔는데, 전 글이 만들어둔 길 위에서 방황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배추에게 답신을 쓰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고요. 드라마 보조작가를 그만두고, 정신이 아닌 육체 쓰는 일을 7개월 동안 했어요. 정확히는 동생의 가게에서 컵밥 만드는 일을 했답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요식업 일을 하려니, 처음에는 수면 중에 손가락이 찌릿해서 잠에서 깨고, 온몸이 근육통으로 뻐근했는데요.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 맞나 봐요. 한두 달 지나고 나니, 일이 몸에 익더라고요.


동생의 컵밥집은 예술대학교 바로 앞에 있어요. 처음엔 일을 하면서 예술대생과 친해져서 재미난 프로젝트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드라마나 영화를 너무 많이 봤던 거죠. 보조작가 일을 하면서 구상했던 저의 작품도 요식업에 관한 내용이어서 도움이 되겠다 싶었죠. 친목은 무슨, 맛있게 드시란 말 말고는 교환한 대화가 없었고요. 작품 구상은 무슨, 장사의 원리가 너무나 흥미로워서 평소엔 손도 안 대던 경제경영서를 탐독한 반년이었어요.


배달 위주의 가게고, 전 저녁부터 새벽에 혼자 일해야 했어서 밀려 들어오는 주문을 쳐내기 바빴지만 나름 재밌는 경험이었어요. 이제 식당에 가면 평소에 안 들리던 “배민1!” “쿠팡이츠 주문!” 소리가 들려요. 그리고 몸이 움찔해요. 장작삼겹볶음밥이구나! 빨리 접수 버튼 눌러서 팬에 기름을 두르고, 장작삼겹을 올려 노릇노릇하게 굽고, 양파를 넣어 캐러멜라이징을 하고, 간장을 한 스푼 반 넣어 감칠맛을 내고, 재료가 익는 사이, 밥을 230g 퍼서 데리야끼 소스를 적당량 넣고 쫀득하게 익은 재료 위로 투하하고, 손목 스냅을 이용한 가벼운 웍질을… (후략)


저는 글과 이별한 7개월 동안 너무 행복했어요. 숨 쉬듯이 읽고 쓰는 삶에서 벗어난 2024년의 여름과 가을이 그 어느 때보다도 즐거웠어요. 그래서 글이 저의 길인지 더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해요. 철썩 같이 믿었던 믿음을 의심해보는 것도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기에 정말 ‘글 이게 뭐라고’ 반짝이는 배추만의 글 조각을 모으는 게 삶의 목표란 말이 멋지게 느껴져요. 온 마음 다해 응원합니다요. 배추의 소설도 궁금해요. 완성하면 꼭 보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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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1)

2020년 가을에 쓴 별에 관한 짧은 글을 첨부합니다. 배추라는 우주엔 수많은 삶의 조각들이 빛나고 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요.​


별은 반짝이거나 은은하거나 둘 중 하나의 형태로 빛난대. 우주에 떠 있는 모든 별들이 반짝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각자 서로를 알아차릴 수 없겠지. 네가 속한 별이 반짝일 때 나는 잠시 은은해질게. 그러면 서로를 더 선명하게 알아볼 수 있을까? 언젠가 너는 별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서 말했지. 저기 보이는 별들은 그 밝기의 뒷이야기를 알 수 없다고. 별이 서 있는 거리에 따라, 살아온 나날에 따라 밝기가 달라진다고 했어. 우리 눈에 밝게 보인다고 저 먼 우주에서도 밝을지 알 수 없다고. 맞아, 정말 알 수가 없어. 네가 품고 있는 별은 항상 나에게 밝게만 보이거든. 그런 너는 얼마나 오래 빛나왔을까? 나에게서 얼마나 멀리, 혹은 가까이 있는 걸까?


밤하늘을 떠도는 별들을 보면 단지 빛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벅차. 그 안에 얽힌 사연이 어떻든 말이야. 네가 품은 별의 이야기를 모르는 채로 남겨둘게. 속내를 굳이 몰라도 충분할 때가 있잖아. 네가 내 시야에서 빛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이미 많은 이야기를 알아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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