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사랑은 어른이 되게 한다
2025년을 앞두고 윤슬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윤슬아 벌써 한 해가 지났네, 올해 한 번도 못 만났지만, 그래도 우리는 글로 엮인 사이고, 너에겐 솔직한 글을 써서 그런가. 항상 가깝게 느껴져. 너에겐 올 한 해가 어땠니. 난 정말 힘들었어.
지난주 회고 요가를 했어. 요가를 끝내고 서로가 어떤 일 년을 보냈는지 이야기하는데 난 정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일 년의 반을 함께한 사람을 잃고, 두 동강 나버린 시간을 마주할 자신이 없거든. 난 이별을 한 여름에 여전히 머물러 있어. 이전에 예술가들이 시나 소설에서 ‘사랑‘을 찬양하면 멍청해 보였거든. 그건 내가 그전까지 단 한 번도 절절한 사랑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이어서 그랬던 거야. 인간을 살게 하는 가장 큰 가치는 사랑이라는 걸 올해 배웠어. 그리고 사랑을 잃었고.
깨진 여름을 지나, 겨울의 한가운데 서있고 곧 새해를 맞이해야 하는데 머릿속 시계는 여름에 머물러 있어. 일을 하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문득 ‘우리는 왜 그렇게 됐을까’, ‘나는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을 되뇌어.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데 제자리를 맴맴 도는게 바보 같이 느껴지던 나날 속, 한강의 인터뷰가 나를 위로했어. 그녀가 소설을 쓰는 동력이 무엇인지, 소설가는 무얼 하는 사람이냐는 질문에 “삶을 맞바꾸는 질문에 머물러 있는 것”, “하나의 장면을 쓸 때마다 나는 질문을 견디며 그 안에 산다”라고 말했어. 그 말을 들으면서 내가 바보가 아니라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자문하고 해부하는 중이라는 걸 알았어.
연인에게 실망하고, 배신감을 느낀 사건들을 떠올리며 왜 화가 났는지 곰곰이 생각하다 다다른 건, 내가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나의 숨기고 싶은 부분을 들켜버렸기 때문이란 걸 깨달았어. 부모에게서 독립적이지 못한 나, 그래서 휘둘리는 사람, 내가 가진 것을 더 부풀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 나란 걸 인정했어. 오랫동안 나 정도면 정직하고 당당한 괜찮은 사람이라며 환상 속에 살았거든. 근데 진짜 나를 마주하니깐 부끄러웠나 봐. 치부를 들키니깐 부끄러워서 사랑하는 사람을 찌르고 도망쳤다는 걸, 헤어지고 혼자 남겨진 시간들 속 자문하면서 비로소 깨달았어.
2025년으로 가기 위해 올해 깨진 여름, 두 동강 나버린 한 해의 조각을 마주해야 하는데, 그 깨진 조각들이 나를 찌르고 벨 거라는 걸 알아서 모른 체 하고 싶었어. 근데 이제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 조각을 수습하면서 베이겠지, 알코올로 소독하고 약을 바르는 순간 너무 욱신거리겠지, 하지만 분명 그건 나아지는 과정이니깐 용기를 갖고 너에게 편지를 쓰며, 회고하고 있어.
나는 이제 ‘송배추’ 이름 세글자로 당당하게 살고 싶어. 어떤 명함이나 배경을 방패삼지 않고 나로 살기 위해 노력할거야. 약하더라도 비겁하지 않는 사람. 초라할 때가 있더라도 가진것에 감사하며 소탈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고 싶어. 그동안 부모나 주변 멋진 사람들을 방패로 나를 포장하며 살았고, 그런 사람들이 대신 흙을 묻혀서 나를 지켜줬기에 우아하고 편하게 살 수 있었다는 걸, 내가 사랑하는 것에서 도망치고 후회하면서 알았어.
올해는 처음으로 회사에서 팀장을 맡게 됐어. 근데 똑같은 실수를 했어. 때에 맞게 팀원에게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거나, 상대가 알아서 계몽되기를 바라거나, 상대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도망치거나 다른 사람이 해결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들 때가 있더라고. 팀장의 마음가짐이 그렇다면 일이 잘 될 리가 없잖아. 그래서 나를 지키고 주변 사람들과 잘 살아가기 위해, 변하려고 노력 중이야.
내년엔 독립이 목표야. 요즘 가계부를 쓰고, 뜨는 청약에 추첨을 넣고, 부동산에 전화를 돌리고, 괜찮은 집 매물을 찾아보면서 나이는 34살인데, 어른으로서 알아야 하는 걸 하나도 모르는 바보라는 걸 느껴.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이 부모덕에 누리고 있는 것에 비해서 보잘것없고, 꿈꿔왔던 35살의 모습이 아니라 신세한탄을 할 때가 많아. 근데 마주하고 깨져야 어른이 되고, 사랑하는 사람과 나를 지킬 수 있다는 걸 큰 아픔을 통해 깨달았으니깐, 도망치지 않고, 내가 가진 소중한 것들을 가꾸고,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살고 싶어. 2025년 우리가 만났을 때 이 편지가 부끄럽지 않도록 하는 게 나의 목표이겠네.
그럼 이만 마지막 너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칠게, 그동안 언니의 편지를 받아줘서 함께 서신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글동무가 돼줘 고마워!
보고 싶은 윤슬에게 배추가.
2024년 12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