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에 쓰다만 편지, 동지에 보내는 편지.
처서 초입에, 윤슬에게
윤슬아, 잘 지냈니? 언니는 그동안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하고, 얼마 전 이별을 했어. 역시 글은 이별하고 나서야 써지는 것인가 봐. 세상은 그대로인데, 그 사람 하나만 삭제됐을 뿐인데, 모든 것들이 새롭게 느껴져. 항상 주말은 동의어는 행복이었는데, 이제 주말은 악몽 같은 시간이야. 자책하고 부질없는 질문들을 속으로 되뇌면서 수많은 번민과 잡념으로 채우고 있어. 터벅터벅 걷고, 혼자 웅얼거리다가 윤슬에게 편지를 써야겠다 생각이 들어 키보드를 두드려.
너와 편지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사랑을 잘 아는 사람처럼 글로 쓰곤 했는데, 그 글이 무색하게 '난 사랑을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었어. 연애할 때 사랑한다고 수만 번을 이야기한 거 같은데, 이제와 깨져버린 관계에서 파편나버린 기억의 조각들을 주우면서 이건 분명 사랑이었는데, 왜 나는 결국 관계를 깨버린 사람이 됐을까 되뇌어. 사랑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어서 인스타에 '사랑과 좋아함의 차이점', '여자가 진짜 사랑에 빠지면 나타나는 현상'의 싸구려 콘텐츠를 보면서 참 이렇게 쉽게 나눌 수 있다면 사랑이 오히려 더 쉬웠고, 이별도 안 힘들겠다 생각해.
오랜 시간 나를 쓰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그 일에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연애를 하면서 글의 무용함을 생각했어. 흔히 우리가 '말로 설명할 수 없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사랑이 딱 그렇지 않니? 이번에 연애를 하면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벅차오름과 충만한 기분을 느꼈는데, 그때의 감정과 에너지는 좀처럼 말로 표현이 안되더라. 사랑을 말로 표현하는덴 번번이 실패해서, 글은 한계가 큰 도구라는 걸 느꼈어. 그래서 다른 표현수단을 찾기 시작했어. 그중 하나가 요리야. 엄마들이 왜 그렇게 자식과 남편의 밥상에 집착하는지 처음 이해했어. 신선하고 갓 딴 야채를 차곡차곡 쌓아 올려 샌드위치를 만들던 시간, 산에 올라가서 맛있게 먹을 도시락을 싸던 시간을 보내면서 참 행복했어. 근데 이마저도 사랑의 크기를 표현하기엔 부족하더라.
그래서 나를 깎고 깎아 마음을 보여주는 행동을 했어. 쏟아지는 졸음을 참으며 밤늦게 까지 전화를 하는 것, 스마트폰 중독자처럼 핸드폰을 보며 답장을 하는 것, 그리고 그 시간을 즐기는 척해보는 것,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믿는 것, 나보다 그 사람이 더 좋다는 걸 우선시 하는며 참는 것. 내가 나를 깎고 깎으면 뾰족하고 위험한 칼날이 된다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지금 어땠을까. 나를 단단하게 지탱하는 삶의 요소들, 혼자 있는 시간이 중요하고, 자유롭고 글을 쓰는 것, 자주 핸드폰 없이 혼자 숙고하는 시간을 눈치 보지 않고 단단하게 싸워서 지켰더라면 어땠을까. 문제가 생겼을 때 모른 체 숨기지 않고, 하나하나 그때마다 말할걸. 아닐 거야. 별일 아닐 거야라고 애써 삼켰던것이 결국엔 터져, 관계를 끓어버린 사람이 되고 말았어.
여름의 초입에 태어났고,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여름이었는데, 불면증과 우울증, 자책과 책망으로 가득 찬 여름. 계절이 바뀌고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할 테니, 겨울엔 일상에 곰팡이가 더 이상 끼지 않기를 바라며.
배추가 윤슬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