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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추도사 Oct 10. 2024

글 이게 뭐라고

배추가 윤슬에게 보내는 네 번째 편지

2024.09 배추

윤슬아 오랜만이야. 잘 지내고 있니,


그동안 편지를 못쓴 건 연애를 했기 때문이고, 다시 편지를 쓰는 건 이별을 했기 때문이지. 삼십 대 중반이 되면 이별 정도는 먼지 털듯 톡톡 할 줄 알았는데, 개 힘들고 돌아버릴 거 같아. 뭐 사랑하다가 헤어지는 이유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이라, 머릿속 번뇌가 가득하구나. 머리가 복잡하고 마음이 고통스러우면 인간은 심오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는 거 같아. 그래서 요즘 스님처럼 '나는 왜 살지', '나는 고통은 어디서 비롯됐는가'라는 질문을 몇 달째 곱씹고 있단다.


난 그동안 왜 사는 건지 잘 몰랐는데 진하게 깊게 사랑하고 힘들게 이별하니깐 조금은 삶의 이유를 알 거 같더라. 바로 글 때문이야. 마지막으로 연인을 만나고 집에 돌아와 눈물범벅이 됐는데, 재빠르게 능숙하게 처리했던 것 중 하나가 비공개해둔 '윤슬이랑 쓴 편지'를 공개로 돌려놓은 거였어. '언젠가 헤어지면 그 글 먼저 복구한다'라고 계획해 둔 것처럼. 슬프고, 후회하고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글을 복구하는 그 순간만큼은 그동안 눌려왔던 숨구멍이 틔이면서 살 거 같더라고.


연애 중 그 글을 우연히 읽은 전남친은 파트너에게 너무 가혹한 거 아니냐고, 자길 배려하긴 하는 거냐며 삭제하라고 화냈어. 나도 고분고분 하진 않았지. 그 글이 지나간 과거고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준 조각이라, 얼마나 소중한지 설득하고 싸웠는데. 남자친구의 입장이 이해가 가고 ‘글 이게 뭐라고’ 사랑하는 사람 싫다는데, 1원 한 푼도 안 나오는 글이라 치부하며 비공개로 해버렸거든.


그땐 사랑을 위해서 내가 당연히 내려놓아야 하는 거라 했는데, 솔직히 맘속 깊은 곳에선 억울했나 봐. 그래서  너와 쓴 편지를 복구하면서 알았어. 아 난 눈치 안 보고 쓰고 싶은데로 마음껏 쓸려고 사는 사람이구나. 모니터의 하얀 문서는 내가 가장 자유롭고 솔직할 수 있는 곳이구나. 시시 때때로 전화 걸어서 너무 보고 싶다. 다시 돌아가서 바짓가랑이 붙잡고 잘못했다고 해야겠다고 생각하다가도 '그럼 쓰고 싶은 글 몰래몰래 쓰는 삶은 넌 할 수 있어? 네가 쓰고 싶은 글보다 연인의 눈치를 보면서 쓰는 삶은 괜찮을 거 같아?‘라는 질문을 던져. 그럼 쉽게 결론이 나. 그리고 오랜만에 솔직한 글 쓰는데 좀 기분이 경쾌해지고 살 거 같은 거 보니 연락 참기 잘한 거 같아.


윤슬도 숨 쉬듯이 읽고 쓰는 사람이잖아. 너에겐 글은 어떤 의미야? 왜 글에 열심히이고 자존심 세우는 거야? 난 등단할 생각도 없고, 인세를 받을 생각도 없어. 내 글 누가 읽든 말든 상관없어 진짜로. 글을 쓸 때마다 '내글구려병'을 앓으며 머리털 쥐어짜면서 이 문장 저 문장을 고치고, 그렇게 완성한 글 속 내가 벌거벗겨져 이상하고 예민한 여자인게 들통이나 연애도 못하는 건 아닐지, 부모님이 우연찮게 글을 읽고 충격받는 건 어쩌나 조마조마하거든. 그냥 안 쓰거나 일기장에나 쓰면 될 것을 한동안 글 안 쓰면 불안증세를 앓아. 글 이게 뭐라고.


연인과 헤어지고 나니깐 뭐가 남았지 생각했봤는데 절망스럽더라. 근로소득 없는, 옹졸한 글 자존심만 높은 서른네 살 여자만 남았더라고. 나잇값 못하는 거 같고, 남자친구에게 너무 의지하고, 부모에게 독립도 못하고, 자존심만 센 내가 다 망쳐버린 거 같아서 우울하더라. 근데 쓴 글들을 하나씩 읽는데 과거의 내가 좀 괜찮았던 시절이 있더라고(ㅋㅋ) 그리고 너랑 쓴 글들도 다시 되찾았고. 그 글들이 나를 위로해줬어. 6년째 써오고 있는 브런치 글 속, 과거의 나를 보니 분명 다시 홀로서고 새로운 모험도 해보면서 재밌게 살수 있겠다 싶었어. 글은 내가 살아있다는 흔적이야. 내 생각과 마음을 작은 화면에 담기위해 노력하고 그게 온전히 글에 담겼을 때 짜릿해. 그래서 모든 글은 나야. 계속해서 이 반짝이는 나의 조각을 모으는 게, 삶의 목표야.


요즘 이별 소식을 듣고 가끔 상처가 되는 말을 듣곤해. 내가 나이 많아 좋은 남자 만나기 어렵다는 거야. 근데 삶의 목표가 좋은 남자 만나는 거 이기 이전에 잘 사는 게 목표이고, 잘 사는 삶이란 그냥 눈치 안 보고 솔직하고 바른 글 쓰는 상태라고 생각하니 상처받은 말들이 같잖아지더라고. 제니퍼 로랜스가 인생은 짧고 청춘은 더 짦으니 만나고 싶은 남자 다 데쉬하면서 살아야한다고 말했다는데, 난 인생 어차피 짧은 거 남자보단 일단 쓰고 싶은 글 다 쓰고 살 거야. 그래서 요즘 언니 에세이론 성에 안 차서 소설 쓰기 시작했어! 인생은 찰나고, 쓸 수있을 때, 거침없이 쓸 거야!


다시 글을 거침 없이 쓰고 싶은 가을,

배추가 윤슬에게


PS. 우리 각자 서로에게 5편씩 편지 쓰기로 한 약속 안잊었지? 명색이 그래도 글쟁이들인데, 그 약속 지키자. 유효기간은 평생으로 해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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