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추도사 Sep 29. 2023

세번 째 출근을 앞 둔 마음

배추가 윤슬에게 보내는 세 번째 편지


산악인이 된 윤슬에게


사랑을 글로 쓴다고 되는 게 아닌데, 우리 둘 다 뭐 하는 짓이니. 여하튼 인간은 사랑에 빠지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지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나 봐. 너의 종이학, 빨간 요한의 동그라미처럼. 난 사실 운이 되게 좋은 인간이야. 왜냐면 사랑을 주지 않아도 사랑을 쉽게 받았어. 사랑을 듬뿍 주는 가족, 그저 좋다고 따라다니던 연인. 사람들이 고기도 먹어본 놈이 안다고 하잖아. 근데 그 말 틀렸어.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사랑을 줄 주 아는 건 아니더라. 요즘 커리어로 이력서랑 면접만 보고 있는데, 어디 한번 회사에서의 나를 얘기해볼까 해.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상황이 썰물처럼 빠져 흔적도 없이 다 사라졌을 때 더 선명해지곤 해. 지난달까지 카페일 했어. 난생처음 서비스직을 해보면서도, 난 에이스가 될 줄 알았어. 일머리도 있고, 어릴 적부터 좋은 레스토랑이나 호텔을 다니면서 고급 서비스를 즐겨봤으니깐. 근데 이 생각이 이틀을 못 갔어. 좋은 서비스를 받았다고, 좋은 서비스를 할 줄 아는 건 아니더라. 주문받다 말고 앞치마 벗고 한바탕 하고 싶은 손님 정말 많았어. 인사도 안 받고 다짜고짜 속사포로 메뉴를 주문하는 인간, 먹은 컵과 그릇을 분리수거 안 하고 그냥 가는 인간, 좀 서툰 직원에게 표정으로 짜증과 답답함을 드러내는 사람. 나도 한마디 톡 쏘아붙이고 싶었는데 분을 삭이면서 커피 내렸어. 그 인간들이 과거 내 모습이랑 너무 똑같아서, 속으로 ‘배추야 업보다’ 하면서 삭혔어.


근데 카페일이 재밌었던 건, 되돌아보고 성장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야. 처음에는 손님과 싸울 뻔한 순간이 많았지만 종종 오는 신사 숙녀 손님 덕분에 서비스를 하는 방법을 배웠어. 항상 저 멀리서 먼저 눈을 마주치면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같은 걸 주문하면서도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주던 신사분. 허둥거리거나 주문이 밀려도 천천히 하라고 말하고 커피를 받아가면서 두 눈을 보면서 두 손으로 커피를 받으며 고맙습니다 말씀하던 숙녀분. 그분들이 종종 '내려주신 커피 맛있어요', '덕분에 항상 아침에 기분이 좋아요'라고 말했는데 정말 커피가 맛있었을 거야. 그 사람들것은 오늘하루도 잘 보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애정과 감사를 담아 내렸거든. 그분들이랑 이야기하거나 눈을 마주치면 뭔가 진짜 서비스를 잘하는 사람이 됐어.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는 요즘, 이전 직장동료들이 정말 많이 떠올라. 이 경력과 성과를 쓰면서 그땐 몰랐는데, 동료들이 나에게 줬던 마음이 이제야 보여. 동료로서 난 어땠나 생각해 보면 나는 내일에만 집중하는 사람이었어. 누군가와 같이 하는 것보다 혼자 하는 게 속 편하다 생각했고, 주장과 색깔이 강해서 이를 밀고 붙였던 거 같아. 혼자 뭘 하려고 하다 보니 잘 안되면 내 탓이라 생각하면서 엄청 스트레스받고 예민해졌어. 아, 쓰고 보니 나도 나랑 일하기 싫어. 근데도 나랑 같이 일하거나 신뢰를 해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 자신의 약점을 먼저 드러내면서 스트레스 너무 받지 말라며 도와준 동료, 실수 연발하던 때 '넌 잘하고 있으니 내가 더 잘할게'라고 말한 선배, 콘텐츠를 잘 못써서 소심해져 있을 때, 대뜸 '역시 배추 글은 재밌어'라고 말해주던 대표. 이력서의 성과 한줄한줄 쓰면서 맘이 아렸어. 그런 마음을 받아놓고서도 그냥 인사치레라 생각해 귓등으로 듣고, 일이 바쁘다며 고마운 표현도 못한 게.


두 번의 이직, 그리고 세 번째 회사 출근을 앞두고 마음은 많이 달라졌어. 옛날에는 회사에 욕심을 부렸어. 동료들이 좀 더 똑똑하고, 경력이 화려한 사람들이면 좋겠다고, 내가 화려한 경력 한 줄을 만들 수 있는 곳인지, 연봉을 많이 주는 곳 등 내가 먹을 단물을 따졌어. 그런데 지금은 좀 달라. 이번엔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는지, 내 퍼포먼스가 아니라, 우리의 퍼포먼스, 동료의 업무를 잘하기 위해서 내가 어떤 걸 도와줄 수 있는지. 그러기 위해선 뭘 배워야 하는지 회사를 다니면서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배워야 할 것들을 계획하고 있어. 물론 난 성인군자가 아니어서, 또 회사 다니면서 '이 망할 놈의 회사'라고 말하겠지. 근데 그때마다 지금의 마음을 잊고 싶지 않아서, 너에게 일러두어. 다시 직장인이 될 언니가 투덜거리면, 이 편지를 꺼내 주렴!


2023 추분. 달리기로 자연을 만끽하고 있는 배추가, 윤슬에게

 

매거진의 이전글 윤슬아, 언니는 말이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