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함을 완전하게 만들어 준 나만의 이야기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라고 어느 시인이 말했지만 나의 이력서를 보고 있자니 위로가 되질 않는다. 기자, 마케터, 야채장사, 옷가게 장사, 텔레마케터, 바리스타. 맥락 없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선택한 건지 모르겠는 직업들. 사주에 물이 많아 잦은 이직이 좋다지만, 이걸 HR담당자에게 말할 수도 없고, 참 답답할 노릇이다. 한국에서 좋은 커리어가 뭔지는 잘 알고 있다. 한 회사에서 최소 3년 이상의 근무, 상향선을 타는 연봉. 그러고 싶었는데, 그게 어려웠다. 책상에 앉아 시키는 일을 고분고분하면 성격이 괴팍해지고 우울해졌다. 그래서 번아웃도, 히스테리, 무력감을 차례로 겪었다. 이 모든 것을 낫게 하는 약은 하나. 퇴사하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것뿐이었다. 30대 초반까지는 패기도 있었고, 그렇게 살아도 괜찮았다. 근데 어느 날 정신 차리고 보니 서른다섯, 미혼이다. 어질어질하다. 혼자 집도 사야 하고, 생계를 꾸려야 한다. 그래서 야생 본능을 죽이고, 35살의 적당한 연봉을 받을 수 있는 그럴싸한 이력서를 썼다. 그렇게 지난 8년을 압축한 이력서 죽 읽으니, 막막했다. 이런 제멋대로의 경력을 받아줄 한국회사는 없을 거 같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페이스북 최고 경영자 셰릴 샌드버그가 "커리어는 정글짐이다"라는 말에 위로받을 뻔했다. 근데 알고 보니 그 여자 하버드대 출신이더라. 결국 나를 위로하는 건 나의 펜일 뿐. 갈지자(之)를 그리는 커리어 속, 많은 걸 내려놓았지만 단 하나, 펜은 단 한 번도 놓지 않았다. IT회사 마케팅 일을 그만두고 커피빈에서 주문을 받다가 전 직장 동료가 ‘어머, 너 왜 이러고 있어?'라는 말한 날, 세일즈로 이직을 계속 실패해 밑바닥부터 시작하겠다며 룰루레몬에서 옷을 팔았는데 '이 언니는 왜 이렇게 센스가 없어'라며 막대하는 손님을 만난 날, 금융 앱에서 연평균 소득이 또래 대비 40% 낮다는 알람을 받은 날. 펜을 더 움켜쥐고 기록했다. 오롯이 마음과 머리가 원한 걸 선택했음에도 부끄러운 날이 많았다. 어릴 적엔 외국에서 유창한 영어를 쓰며 위풍당당하게 일하는 여성을 꿈꿨는데, 지금의 나는 어릴 적 꿈과 아주 멀어져 있었다. 소개팅남에게 직업을 말하는 게 부끄러워서 그냥 백수라고 얼버무리고, 부모에게는 숨기는 게 많은 어른이 됐다.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 전문직과 연봉으로 나눠지는 계급 사회에서 옷에 파묻혀 재고 정리를 하고 시장 바닥에서 야채를 팔고, 무작위 전화를 거는 CS 상담일은 비웃음을 샀다. 나 또한 내 일을 '알바'나 '잠깐 경험 삼아하는 일'로 남들 앞에서 내 일을 폄하했고, 미래가 두려웠다. 하지만 실상은 배움은 깊어젺고 앎은 넓어져 말그대로 ‘일할 맛’이 나고 일하는게 즐거웠다. 그래서 남들이 내멋대로 커리어가 엉망진창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더 펜을 더 움켜쥐고 글을 썼다.
‘절경은 시가 되지 않구나, 하지만 나는 글을 쓸 줄 알고, 선택에는 다 본능적이고 나만의 논리적인 이유가 있어. 그러니깐 남들 눈엔 엉망진창인 커리어여도 상관없어. 이건 내 커리어고 이 이야기는 내가 쓸 거니깐’
동료는 왜 저럴까? 나는 왜 이모양일까? 연봉을 왜 깎았을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라는 물음을 곱씹고 해석하는 과정이 하나의 글로 완성되면 나 자신에게는 괜찮다고 인생에 확신이 생겼다. 지금 불합격이나 연락 없어도 정말 상관없었다. 어차피 옷이나 과일을 다시 잘 팔면 될 일이니깐. 이젠 뭐라도 팔 수 있으니깐 회사의 거절에 좌절하지 않는다.
신입사원 시절 8년 차 직장 생활을 하면서 꿈에 그린 모습은 '어떤 일이든 척척 해내거나', '연봉을 많이 받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내가 되고 싶은 건 ‘남들이 말려도 본인이 해보고 싶은 걸 용기내 실패하더라도 그 속에서 자신만의 커리어 스토리를 만드는 사람’, ‘회사일에서 배운 걸로 자신만의 그림과 시를 써낼 줄 아는 사람’이다. 벌써 서른다섯, 언제까지 회사원으로 살까. 회사를 정말 그만 다니겠다고 하고 이력서를 더 이상 쓰지 않아도 되는 날. HR담당자가 아니 나 자신에게 떳떳한 한 장의 이력서를 완성하기 위해서, 앞으로도 용기내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겠다. 그리고 계속 엉망진창인 풍경에 펜으로 시를 써 작품을 만들게 하는 일을 선택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