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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추도사 Aug 31. 2020

초보 비건 요리사의 철학

부족해도 충분한 요리

농부 아저씨와 직거래로 구매한 밤호박:) 자세히 보면 겉면이 우둘투둘한 게 꼭 두꺼비가 웅크리고 있는 거 같다.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밤호박을 샀다. 상자 속 올망졸망 아기 두꺼비 같은 밤호박을 어떻게 해 먹지 고민했다. 냉장고 속에 재료들을 골똘히 생각했다. '생크림이 조금 남아 있으니깐 밤호박 찌자. 디종 머스터드도 조금 남아있는데, 밤호박 샌드위치를 만들면 되겠다! 이참에 생크림도, 디종 머스터드도 다 먹어버려야겠다 흐흐', '호밀빵만 있으면 되니깐 마감 세일 때 가서 사 와야겠구나! 히히' 3천 원 정도의 빵값만으로 내일 아침은 풍족하겠구나!


채식 지향 요리는 모자람을 즐기는 방법을 터득하게 했다. 조금 모자라도 '제철 재료'를 활용하면 깊고 달콤한 요리가 탄생했다. 초보 요리사 시절, 음식을 먹는 순간이 제일 행복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야채를 깔끔하게 다듬어 어느 한쪽도 남기지 않고 다 쓸 때, 생크림과 두부 등을 유통기간을 전에 다 쓸 때, 재료 욕심부리지 않고 정량을 사, 하루 이틀 사이에 다 먹어버릴 때. 행복을 넘어 쾌감을 느낀다.  


한 때 요리는 스트레스였다. 요리를 할 때마다 버리긴 아까운데 처치 곤란한 재료들이 많이 남고, 실제 레시피에는 조금밖에 쓰지 않는데 대량으로 구입해야 할 때마다 난감했다. 가성비를 생각해서 대량으로 야채들을 샀다가 한 달 동안 냉장고에 둬, 야채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죄책감이 쌓였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관뚜껑을 여는 거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돈을 아끼자고, 건강해지자고 직접 요리를 시작했는데, 동시에 상하고 썩는 것을 지켜봐야 해 스트레스가 쌓였다.


그래서 모자라도 즐기기로 했다. 장 보기 전 냉장고에 있는 야채를 점검하고 정말 필요한 야채만 장바구니에 넣었다. 2+1 행사에 이끌려 구매량을 정하기보다는 몸상태에 맞는 식단량을 고민해 그만큼만 샀다. SNS에 뜨는 레시피 보다, 냉장고에 남아있는 야채를 활용할 수 있는 레시피를 검색했다. 셰프가 알려준 레시피 데로 하면 제일 맛있겠지만 냉장고의 수용 능력 및 식단, 지갑 사정을 고려해 재료를 더하고 뺐다. 내일 아침에 먹을 밤호박 샌드위치는 디종 머스터드가 부족할 테고, 치즈나 계란이 들어가면 더 맛있겠지만 그래도 이대로도 충분하다.


다음날 가을 아침. 호밀빵을 프라이팬에 바삭하게 굽고, 그 위에 밤호박 스프레드를 듬뿍 담아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두 쪽으로 나눠 엄마와 먹었다. 우린 재료들이 조금씩 부족한 밤호박 샌드위치를 먹으며 행복했다. 엄마에게 큰 쪽 줘서 그런가 조금 배고픈 듯했지만,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곧 점심이 올 테니깐.


**저는 비거니즘을 지향하지만,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습니다. 계란과 우유, 치즈 등을 가끔 먹고 있는 플렉스 테리언(가끔 육류를 섭취하는 사람)입니다.

직접 만든 밤호박 샌드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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