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추도사 May 06. 2020

오늘도 채소 도시락을 싸는 이유

배추도사의 비거니즘

채식 지향 주의자의 풍성한 점심식사, 직접 만든 그릭 요구르트는 밤사이 더운데 내버려두기만 했는데도  번식 해 알아서 음식이 된다.  고구마도 열처리 몇 번 해주면 꿀을 쏟아낸다.


새벽 6시,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부엌으로 나선다. 냉장고를 열자 채소들이 서로 데려가 달라며 아우성이다. 제철이 지나긴 했지만 달고 아삭한 맛이 좋은 양배추는 점심 도시락의 단골 재료. 일주일간 방치한 파프리카는 ‘나 오늘이 한계야’하며 구조요청을 한다. 지금이 제철인 감자는 껍질은 반들, 속은 단단한 못 본체 하기 어렵다. 이제 준비 완료. 나무 도마를 꺼내 양배추를 가르니 빈틈없이 촘촘히 자랐다.


‘추운 겨울 너는 성실하게 자라서 오늘 나에게 먹히는구나, 기특하게 잘 자란 만큼 남기지 않고 다 먹어줄게! 고마워. 매일매일 커 알토랗게 자란 너를 먹었으니깐 오늘 나의 하루도 너 같길’


채식 지향 주의자로 살아온 지 언 1년이다. 채식주의자라고 커밍아웃하면 주변의 반응은 엇비슷하다. ‘다이어트 때문이냐’부터 ‘고기를 어떻게 안 먹냐’고. 나 또한 과거에 그랬다. 오히려 채식주의자 들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고기를 안 먹으면 사회생활을 안 하겠다는 거냐’며 어이없어하거나 왜 저렇게 피곤하게 사냐고 생각했다. 고기반찬이 없으면 반찬투정도 서슴없이 했다.


그랬던 내가, 불현듯 내 인생의 주도권을 갖고 싶다고 생각한 날. 요리를 시작했다. 사회생활은 수동태와 거짓으로 점철됐다. 점심, 야식 메뉴도 주는 데로 군말 없이 먹었다. 그저 그런 음식을 먹으면서 맛있다고 해야 하는 순간들도 잦았다. 이 피로감이 쌓여 점심은 건너뛰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렀지만 미팅이 생기면 맛집을 찾아내 애써 뭐를 먹어야 했다. 내 혀와 위인데 타인이 결정한 것들로 채워지는 것. 비단 식사만 그럴까. 내 커리어도 연애도 다 남의 뜻대로 꾸역 꾸역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날들이 반복되다, 노동법에 적힌 대로 점심시간은 오롯이 내 시간으로 지키겠다는 노동자의 발악이 터진 날 장을 보고 앞치마를 둘렀다.


처음부터 채식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눈알이 달린 생선, 수줍게 다리를 오므리고 있는 닭을 손질하면서 요리가 아닌 생을 끓어내고 있는 행위를 한다는 생각에 스트레스가 쌓였다.


‘주도권을 가지려는 거지 무언갈 죽이고 싶지 않아’


그래서 채소 요리를 시작했다. 채소 요리는 감사함을 느낄 수 있다. 잘 자라온 채소를 보며 어느 농부가 이렇게 잘 길렀나, 작년 겨울은 비가 참 안 왔는데 그래도 채소들은 참 잘 자랐네 라고 생각했다. 그저 칼로 썰고 불로 댑혔을 뿐인데 신선하고 건강한 맛을 내뿜는 야채들이 기특했다. 짧은 점심시간이지만 작은 재료들이 이 순간을 위해 지난 계절부터 자라와 나에게 왔다 생각하니 감사했다.


직장인에게는 가장 바쁠 출근 준비시간, 아무리 졸려도 의지를 다지며 야채 도시락을 싸는 이유는 오늘 하루도 나에게 주도권이 있음 인지하는 소중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일요일 저녁, 다가올 한 주간의 ‘내가’ 먹을 채소를 장보고 출근 전, 점심의 ‘나’를 위해 불 앞에 서고, 점심시간 온전히 ‘내가’ 원하는 것들로 위를 채워 넣는 일. 어느 영화의 명대사인 ‘내 인생은 나의 것’이란 말을 채소 요리를 하면서 오롯이 이해하게 됐다.

내 삶은 나의 것이니깐, 그래서 내일 아침에도 채소 도시락을 싸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초보 비건 요리사의 철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