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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추도사 Jun 23. 2020

비거니즘이 구차하게 느껴지는 날

그래도 텀블러를 챙기는 이유

점심 도시락의 단골 메뉴, 토마토 마리네이트. 토마토+올리브유+후추+양파 쉐낏쉐낏하면 된다.



도시락통을 씻을 생각을 하니 구차하고 짜증이 몰려왔다. 이직을 준비 6개월이 훌쩍 넘었는데 아직도 못했다. 서류를 냈던 곳들 마저 불합격 소식을 받은 터라 더이상 결과를 기다리는 곳도 없어 허무했다. 요 몇개월 온 신경은 이직에만 꼿혀있다. 회사 생활의 버팀목이었던 동료 마저도 퇴사를 결정하면서 마음은 더 심란해졌다. 앞으로 회사에서 감정을 교류할 곳이 없다는 두려움. 다들 이곳을 떠나 각자 살길을 찾아가는데 혼자 떠나지 못해 남겨져 진다는 패배감이 드는날. 고작 플라스틱 하나 줄이기 위해 설거지를 하는게 구차하게 느껴졌다.


여유가 없으니, 플라스틱을 재활용하거나, 손수건을 이용하는 게 뭔의미인가 싶었다. 인생에서 커리어가 자존심인 나는,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다른 일들이 귀찮아 졌다. 그래서 도미노가 무너지듯 일상의 작은 습관들을 무너뜨리고 있다. 아침에 채소도시락을 싸는 일도, 쓰레기를 줄이는 실천도 다 안중에 없다. 점심시간, 아침에 겨우 싼 도시락을  먹는데 마침 라디오에서 배달음식은 쓰레기가 많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했다. 도시락을 싸고, 이를 씻어서 다시 사용하는 일. 분명 며칠전, 나는 작고 사소한 이 실천에 성취감을 느끼고 이 작은 뿌듯함이 업무나 인간관계에서 긍정적인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근데 배달음식을 자제 해야한다는 라디오 DJ의 핀잔에 썩소를 지었다. 오늘 만큼은 배달음식을 시키는 사람이 이해가 됐다.


불현듯 기생충의 명대사 '부자니깐 착하다는 말'가 떠올랐다. 점심시간 야채를 씹으며 '비거니즘도 여유가 있어야 하는걸까' 되물었다. 평소 사람들에게 야채를 사서 레시피 보고 요리를 하라고 말했고, 무겁지만 '텀블러'를 챙기라고 말했다. 또 배달음식이 많은 쓰레기를 남긴다며 핀잔을 줬었는데 이건 바로 '비거니즘 꼰대'. 하루하루 버티는 이들에게 난 참 부담스러운 존재 였을거라생각했다. 마음이 움직여야 생각과 행동도 따라오는 법인데 당장의 먹고사니즘과 인생의 큰 문제를 맞닥드린 이들에게 일회용품을 쓰는건 환경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닌 너무 마음이 지쳐있기 때문일거라 생각했다.


플라스틱 도시락을 들고 개수대로 가 설겆이를 했다. 말 그대로 '정말 다 부셔버리고 싶다'와 '아무것도 안하고 누워있고 싶다'는 문장이 뇌를 둥둥 떠다녔던 점심시간. 그래도 재활용을 하는데는 그동안 비거니즘을 실천하면서 행동이 생각과 마음에 변화를 준 경험을 여러번 했기 때문이다. 텀블러와 손수건을 챙기고, 야채를 먹는 '비거니즘'을 실천 한 이유는 작고 사소한 일이지만 그만큼 실천 쉽고 하고 나면 뿌듯해, 다른 일을 긍정적으로 시작하는데 시동을 걸어줬기 때문이다. 도시락에 달라붙은 음식물을 뽀득뽀득 씻으며 '비건 꼰대짓'을 씻었다. 그리고 다시 다짐했다. 배달음식을 시키려는 사람에게 꼰대짓을 하기 보다는 대신 도시락을 싸주고 과일을 나눠먹자고 말이다. 그리고 아무리 내 일상에 큰 문제 하나가 일어나더라도, 나머지 소중한 일상을 무너뜨리지 말자고 말이다.


비건지향주의자의 회사생활 필수템, 손수건 텀블러, 대나무 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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