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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추도사 Sep 10. 2020

고기를 뜯어도 비건

초보 비건, 재료 너머를 생각하는 상상력

생리 전 기력이 딸려 고기 샐러드를 먹었다. 하지만 누린내가 역해서 꾸역꾸역 먹고 식물성 단백질을 먹겠다고 다짐했다.


너 비건이라며 왜 고기 먹어?


한 달에 한두 번 고기를 먹는다. 저혈압이나 빈혈기가 있을 때, 고기는 그 어떤 재료보다 빠르게 기운을 회복시켜준다. 생리 며칠 전, 항상 기운이 달린다. 그럼 정육점에 가 고기를 끓어온다. 고기를 거의 안 먹다 보니, 아무리 비싼 한우를 구워도 누린내가 나 역하다. 근데 몸은 30년 가까이 고기를 먹었기 때문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최소한으로 고기를 꼭 필요할 때만 먹는다.


때때로 고기를 먹지만 비건을 지향하기 전과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마음가짐 말이다. 핏물을 뿜어내며 구워지는 고깃덩어리를 보며 그 죽음이 헛되지 않게 기운내고 튼튼해지자고 주문을 외운다. 예전에 고기는 그저 수많은 반찬들 중 하나였다. 지금은 다르다. 고깃덩어리 너머를 상상하고 감사할 줄 알게 됐다. 올망졸망한 소의 눈망울, 그리고 도축업자의 노고. 한 입 먹고 누린 맛에 더 못 먹겠다 싶지만, 내 몫의 고기는 다 먹는다. 고작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려지기 위해 '소'가 죽었다고 생각하면 차마 남길 수 없다.


고깃 덩어리 너머를 상상하게 되면서 식탁 위에 오른 모든 재료들의 여정을 상상하게 됐다. 고기뿐만 아니라 채소나 과일도 그렇다. 품질 좋고 싼 가격의 야채를 사기 위해 농부와 직거래를 하게 됐다. 각 농부들이 직접 운영하는 블로그에는 농사를 짓는 풍경이 투박하지만 솔직하게 설명돼 있다. 한 여름, 길쭉길쭉 뻗은 옥수숫대를 블로그에 올리며 실한 옥수수를 배송하겠다고 장담하는 글이 올라와 주문을 넣었다. 하지만 며칠 뒤 너구리가 한밤중에 갉아먹고 가 망연자실한 포스팅이 올라왔다. 농부는 괜찮은 것들을 고르고 또 골라 서울로 택배를 보낸다. 어떻게 지킨 야채들인지 알게 된 이상 택배 상자에 담겨온 야채들은 야채 그 이상이다. 올해 기상이변 때문에 당도가 낮거나 낙과, 그리고 상처 난 과일들이 많다. 조금 부족해도 농부가 최선을 다해 기른 자식 같은 녀석들. 야채도 과일도 상처가 났지만 소중하다.


이전 같으면 이런 걸 왜 파냐고, 사기당했다고 성냈을 텐데 지금은 작거나 상처가 난 것도 맛있게 먹는다(과일은 못생기거나, 상처 난 게 더 맛있다). 농부가 애지중지 키웠고, 궂은 날씨 속에서 작은 열매를 맺는 게 어려운 일이란 걸 깨우쳤기 때문이다. 유치원에서 '농부 아저씨 감사합니다', '소와 돼지가 건강하게 자라줘서 고마워'라고 말한다음 점심을 먹곤 했다. 25년이 지나서야 그 말을 온 마음으로 이해하며 식탁에 앉는다. 고기를 씹으며 소에게는 미안함과 감사함을. 쌀 한 톨에는 궂은 날씨에도 벼를 잘 길러낸 농부에게 감사하는 나날. 그래서 음식을 남기지 않으려는 노력. 정말 비건이 아니었다면 이럴일도 없었다. 분명 비건 이전과 지금은 다르다. 고기를 먹어도 그 마음이 다르니깐.


*저는 플랙스 테리언입니다. 고기를 가끔 먹지만 일상 속에서 환경과 자연의 훼손을 최소화하는 비거니즘을 지향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 중인 초보비건 입니다.


**농부와 현장 직거래를 하면서 식탁 위의 수많은 재료들을 더 감사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농부시장 마르쉐(https://www.instagram.com/marchefriends/)에서 신선한 야채와 소스들을 사러 갔다가 농부와 직거래의 재미를 알게 돼면서 최대한 식재료는 직접 농부에게 구매하고 있어요. 마르쉐 공식 인스타그램에는 장이 서는 날이 업데이트됩니다. (정동, 혜화, 성수, 합정에서 장이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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