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추도사 Sep 10. 2020

고기를 뜯어도 비건

초보 비건, 재료 너머를 생각하는 상상력

생리 전 기력이 딸려 고기 샐러드를 먹었다. 하지만 누린내가 역해서 꾸역꾸역 먹고 식물성 단백질을 먹겠다고 다짐했다.


너 비건이라며 왜 고기 먹어?


한 달에 한두 번 고기를 먹는다. 저혈압이나 빈혈기가 있을 때, 고기는 그 어떤 재료보다 빠르게 기운을 회복시켜준다. 생리 며칠 전, 항상 기운이 달린다. 그럼 정육점에 가 고기를 끓어온다. 고기를 거의 안 먹다 보니, 아무리 비싼 한우를 구워도 누린내가 나 역하다. 근데 몸은 30년 가까이 고기를 먹었기 때문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최소한으로 고기를 꼭 필요할 때만 먹는다.


때때로 고기를 먹지만 비건을 지향하기 전과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마음가짐 말이다. 핏물을 뿜어내며 구워지는 고깃덩어리를 보며 그 죽음이 헛되지 않게 기운내고 튼튼해지자고 주문을 외운다. 예전에 고기는 그저 수많은 반찬들 중 하나였다. 지금은 다르다. 고깃덩어리 너머를 상상하고 감사할 줄 알게 됐다. 올망졸망한 소의 눈망울, 그리고 도축업자의 노고. 한 입 먹고 누린 맛에 더 못 먹겠다 싶지만, 내 몫의 고기는 다 먹는다. 고작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려지기 위해 '소'가 죽었다고 생각하면 차마 남길 수 없다.


고깃 덩어리 너머를 상상하게 되면서 식탁 위에 오른 모든 재료들의 여정을 상상하게 됐다. 고기뿐만 아니라 채소나 과일도 그렇다. 품질 좋고 싼 가격의 야채를 사기 위해 농부와 직거래를 하게 됐다. 각 농부들이 직접 운영하는 블로그에는 농사를 짓는 풍경이 투박하지만 솔직하게 설명돼 있다. 한 여름, 길쭉길쭉 뻗은 옥수숫대를 블로그에 올리며 실한 옥수수를 배송하겠다고 장담하는 글이 올라와 주문을 넣었다. 하지만 며칠 뒤 너구리가 한밤중에 갉아먹고 가 망연자실한 포스팅이 올라왔다. 농부는 괜찮은 것들을 고르고 또 골라 서울로 택배를 보낸다. 어떻게 지킨 야채들인지 알게 된 이상 택배 상자에 담겨온 야채들은 야채 그 이상이다. 올해 기상이변 때문에 당도가 낮거나 낙과, 그리고 상처 난 과일들이 많다. 조금 부족해도 농부가 최선을 다해 기른 자식 같은 녀석들. 야채도 과일도 상처가 났지만 소중하다.


이전 같으면 이런 걸 왜 파냐고, 사기당했다고 성냈을 텐데 지금은 작거나 상처가 난 것도 맛있게 먹는다(과일은 못생기거나, 상처 난 게 더 맛있다). 농부가 애지중지 키웠고, 궂은 날씨 속에서 작은 열매를 맺는 게 어려운 일이란 걸 깨우쳤기 때문이다. 유치원에서 '농부 아저씨 감사합니다', '소와 돼지가 건강하게 자라줘서 고마워'라고 말한다음 점심을 먹곤 했다. 25년이 지나서야 그 말을 온 마음으로 이해하며 식탁에 앉는다. 고기를 씹으며 소에게는 미안함과 감사함을. 쌀 한 톨에는 궂은 날씨에도 벼를 잘 길러낸 농부에게 감사하는 나날. 그래서 음식을 남기지 않으려는 노력. 정말 비건이 아니었다면 이럴일도 없었다. 분명 비건 이전과 지금은 다르다. 고기를 먹어도 그 마음이 다르니깐.


*저는 플랙스 테리언입니다. 고기를 가끔 먹지만 일상 속에서 환경과 자연의 훼손을 최소화하는 비거니즘을 지향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 중인 초보비건 입니다.


**농부와 현장 직거래를 하면서 식탁 위의 수많은 재료들을 더 감사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농부시장 마르쉐(https://www.instagram.com/marchefriends/)에서 신선한 야채와 소스들을 사러 갔다가 농부와 직거래의 재미를 알게 돼면서 최대한 식재료는 직접 농부에게 구매하고 있어요. 마르쉐 공식 인스타그램에는 장이 서는 날이 업데이트됩니다. (정동, 혜화, 성수, 합정에서 장이 열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거니즘이 구차하게 느껴지는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