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소비 시대, 소비를 모르는 가족의 연말 나기
우리 집은 기념일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기념일을 시끌벅적하게 챙기지 않고, 오히려 까먹기 일쑤다. 서로의 생일도 까먹고 부랴부랴 저녁에 축하한다고만 말하고 끝내는 집이다 보니 크리스마스나, 어린이날 등을 챙기는 건 사치다. 이런 집에서 살아왔기에 시시때때로 기념일을 챙기는 사회생활에 적응을 못할 때가 많다. 누군가가 생일 축하를 해주고 선물을 사주면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여전히 잘 모르겠고, 나 또한 누군가의 기념일을 위해 선물을 고르고 서프라이즈를 기획하는 게 버겁다. 뭐 생일만 있으면 다행인데, 요즘은 브라이덜 파티, 베이비 샤워 같이 외국 축하파티도 많아져 버겁고 힘든 날들이 배가 됐다. 솔직히 이게 인스타에 올리기 위함인지 정말 축하를 위함인지 알 도리가 없지만 우선 주인공이 원하니 한다! 나도 사회 구성원이니깐 하자라고 주문을 외우며 파티에 참석한다.
어렸을 적에는 부모가 미웠다. 갖고 싶은걸 받을 수 있는 생일, 크리스마스 등을 그냥 지나치니 아쉬워서 눈물이 났다. 선물을 안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훈계도 들었다. '너는 매일이 생일이고 어린이날 이잖니, 부모님도 있고 따뜻한 집도 있고,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으니 매일이 행복한데 이런 날은 오히려 지금 가지고 있는 거에 감사해야 하는 날이다'라고 말이다. 크리스마스에는 오전에 성당에 가서 헌금을 좀 더 낼뿐이고 끼니도 다른 날과 비슷한 메뉴를 먹을 뿐이었다. 오히려 바깥에 나가면 뭐든 비싸고 길이 막히니 우리 집은 크리스마스나 새해엔 내내 집에서만 지냈다. 기념일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그저 오늘도 여느 날처럼 소중한 하루라고 말하는 부모 밑에서 자라 사회생활에서 참석해야하는 기념식에서 부적응자로 남고 있다. 하지만 요즘은 시끌벅적한 파티 속 한편에 웅크리고 앉아 생각에 잠긴다. '기념일이 없는 우리 집의 가풍이 정말 좋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건 남들처럼 하는 게 가장 편하다는 것이다. 남들 하는 데로, 미디어가 알려주는 데로 비슷하게 따라 하는 게 가장 쉽고 갈등을 피하는 일이다. 우리 부모도 크리스마스 때마다 선물을 챙기고, 비싼 레스토랑에 가서 밥을 먹었더라면 괜히 눈물을 흘리는 나에게 설교할 일도, 티브이나 다른 친구들의 엄마와 달리 우리 집은 왜 특별하게 챙기지 않는지 이해를 시키는 일도, 그 과정에서 괜히 미안해할 마음도 없었을 텐데라고 생각이 든다. 오히려 지금 10년이 넘는 훈육 덕에 매일 소중하게 보내고, 기념일이 다가오면 선물을 살 고민보다는 지금 내 곁에 있어서 고마운 사람의 의미를 되새긴다. 그리고 선물보다 진심을 담은 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과소비의 시대에 흔한 물건보다 편지나 음식 등 내 정성을 담은 선물이 뭐가 있을까 고민해본다. 여전히 단체 생활을 해야 하니 가끔은 계산기를 두드리면서 선물을 하기도 하고 막상 좋은 물건을 구매하면서도 실제로 애물단지가 되지 않을까 고민해 교환권을 넣으면서 씁쓸해 하지만 말이다.
코로나로 연말 같지 않다고 한다. 여행이며, 호텔과 백화점, 레스토랑 이용이 제한돼 그렇겠지만, 언제나 집에서평소와 비슷한 반찬을 먹으며 보냈던 나에겐 예전 같지 않다는 말들이 내가 남들과 다르게 보내긴 했구나 싶다. 정부 당국이 호텔의 숙박을 막는 조치들을 보고 참으로 생경 하다. 여하튼 우리 가족은 크리스마스에 느지막이 일어나 만둣국을 먹고 집 뒤 공원을 다 함께 산책하는 조촐한 하루를 보냈다. 오랜만에 함께하는 휴일. 올해 아빠가 쓰러지긴 했지만 다시 잘 회복했고, 가족 구성원 모두가 크리스마스를 건강하게 보낼 수 있음에 감사하다. 이제 남은 연말 그리고 새해도 비슷한 비슷한 풍경이겠지만,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며 감사한 마음을 부쩍 담아 메시지를 보내고 한해를 맞이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