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이른 아침은 안개로 자욱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이 편한지 아이들이 잘 잔다. 커피 한 잔이 있으면 더 좋겠지만 본격적인 하루가 시작되기 전, 이 시간이 아쉬워서 키보드를 두드린다. 잊기 전에 이번 가을 여행을 추억해 보려고. 여행지에서 남긴 기록을 보니 힘들다는 투정뿐이다. 애들이 어리니 그거야 각오했으면서. 기록을 보니 못내 민망하다. 그렇다면 좋았던 기억들도 한 번 추려볼까. 여행하면 먹거리, 볼거리, 놀거리 아니겠나.
이번 여행에서는 열흘을 보낸 만큼 다양히도 먹었다. 우리 부부는 면을 좋아한다. 관동지방에서는 비빔면 위에 매콤 달콤한 명태회를 올리는데 막국수는 물론 냉면에도 잘 어울렸다. 육수를 부어가며 감칠맛을 달리하는데 처음에는 자박하게 넣었다가 점점 육수양을 늘려가며 간을 조절하는 재미가 있다. 식초나 겨자 등도 비치되어 있었으나 본 양념이 훌륭해서 손을 대지 않았다. 전국적으로 백촌 막국수가 유명한데 현지 호스트의 추천으로 방문한 금화리 막국수는 여태 먹어 본 비빔 막국수 중 최고였다. 또 다른 추천 식당인 백도 막국수는 다음 기회에. 고향냉면은 숙소 앞인데다 중식도 함께 먹을 수 있어서 방문하였다. 매운 음식을 먹지 못하는 첫째 유나에게는볶음밥을 줬다. 신발을 벗는 곳임에도 흔쾌히 유모차를 들여준 마음만큼이나 음식도 정갈했다. 회냉면도 맛있었지만 냉면 장국이라는 사골육수는 감칠맛이 대단했는데 유나가 한 그릇을 다 먹었다.
금화리 막국수의 동치미, 비빔, 수육
바닷가 하면 회를 빼놓을 수 없지. 그런데 인근 횟집 가격을 보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소위 스끼다시라 부르는 곁들이찬 가격이 반영되었다 싶더라도 둘이 먹는데 십만 원이 넘는 지출을 하기엔 부담스러웠다. 둘째 날에 회제작소라는 곳에서 모둠회를 포장했다. 랩 위에 광어, 우럭, 마르미라고 친절히 표시를 해 주셨네. 광어, 우럭이야 아는 맛이지. 마르미가 뭔가 했는데 방어 새끼란다. 좀 더 추워지면 기름이 차겠지만 기름기 적은 새끼 방어도 담백하고 좋았다. 속초 이마트는 특별한 점이 있었는데 수산코너 너머에서 공장처럼 회가 떠지고 있다는 점이다. 회전율이 높아서 금세 팔리고 또 채워진다. 10여분을 서성이니 갓 만들어진 포장 회가 진열대에 새로 쌓인다. 연어가 먹고 싶은 아내의 바람으로 도미, 광어, 우럭, 연어, 도다리가 함께 있는 모둠회를 골랐다. 가격은 37,000원. 아내가 먹다가 물린다고 할 만큼 양도 넉넉했다. 이날 먹은 도다리의 단맛이 입에 남길래 아홉째 날엔 속초중앙시장 지하에서 도다리를 포장했다. 오가는 길에 튀김이나 메밀 전병 같은 주전부리도 고르고. 건어물상에서 구매한 마른오징어는 가격과 맛이 놀랍다. 부드럽고 쫀쫀하다. 현지가 다르긴 다르네.
아이들로 인해 식당을 이용하기 어려웠기에 상당한 끼니를 숙소에서 해결하였다. 갈 때부터 쌀과 김치, 기본양념을 챙겨 갔는데 하나로마트에서 장을 보니 집밥 준비가 끝났다. 첫날은돼지 앞다리살을 넣은 김치찌개를 끓이고 삼겹살을 구웠다. 비치된 전기밥솥으로 갓 지은 쌀밥에 쌈 채소까지 더하니 훌륭한 한 상이 나온다. 찌개가 맛있어서 다음 날 아침엔 계란말이를 곁들인다. 바지락으로 국을 끓여도 맛있다. 대파 흰 부분을 넣어 단맛을 뽑고 국물이 탁해지지 않게 마늘은 다지지 않고 편을 썬다. 청양고추도 씨가 빠지지 않게 길게 칼집만 내고 넣는다. 한 소끔 끓여 소금으로만 간을 맞추어도 이미 시원 칼칼하다. 된장을 조금 넣으면 정말 맛있는데 아쉽게도 그건 놓고 왔다. 요리에 신이 나서 프라이팬도 하나 샀다. 가벼운 아침으로 계란물을 입혀 토스트를 만들기도 하고 호화롭게 채끝 스테이크를 굽기도 했다. 열흘 간 파 한 단과 계란 한 판 그리고 김치 한 통을 비웠다.
물론 숙소에만 있던 건 아니다. 바닷가에서 보지 못한 건 일출뿐. 체크아웃을 할 때 오션뷰가 아닌 숙소여서 미안해하는 호스트에게 바다는 질리게 보았다고 답할 정도로. 둘째 날은 일찍 온 가족이 산책을 나섰다. 청간 해변을 거니는 동안 유나는 갈매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이내 같이 깍깍거린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게 걷다가 카페 포우제에 닿았다. 드립 커피에 치아바타. 전시된 <마흔에 읽는 니체>를 발견한 아내의 눈빛이 빛난다. 아직 십 년은 이르지 않나. 이 인연이 결국 우리를 속초 동아서점으로 이끌기도 했다. 한편 아야진의 아침은 눈부셨다. 유나를 데리고 나선 늦은 아침 산책에서 만난 아야진은 문자 그대로 파랗고 하얬다. 힘찬 소리와 함께 해변에 닿기 한참 전부터 부서지는 파도에는 10월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정열이 남아 있더라. 더러는 서핑을 하기도 하고 물질을 하거나 낚시를 하기도 하였는데 이들 모두 아야진의 일부였다.
잔잔한, 아침 청간 해변
아야진 해변 포토존, 셀프 카메라 모드로 찍으면 좌우가 반전된다.
차를 타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숙소에서 가진항까지 해변길로만 드라이브를 하면서 만난 자작도 캠핑장과 연수원 사이에 놓인 바다는 한동안 차를 멈추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이날 내비게이션을 쓰지 않고 다니다 만난 카페 온더버튼의 루프탑은 우리 부부에게 푸른 바다를 보며 잠시 생각을 비우는 여유를 선물해 주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습하거나 마르지도 않은, 가을 그늘 아래 귀밑으로 흘러드는 바람. 그런 날 그런 시간에 잠시 기댈 수 있어서 좋았다. 카페 스퀘어루트와 바다정원은 해변에 접하여 유나를 데리고 나가 놀 수 있어서 좋았다. 모래놀이를 한참 하고 나면 아이도 돌아오는 차에서 만족스럽게 잠이 들었으니까. 청간정에는 두 번을 갔는데 채규하 대통령이 남긴 글귀가 인상적이다. 악해상조고루상 과시관동수일경. 부족한 한자 실력으로 더듬더듬 해석하고 인터넷을 찾아보니 조금 틀렸다. 과는 결과가 아니라 과연으로도 쓰이는구나. 청간의 앞바다엔 암초가 있나 보다. 멀리서부터 하얘진 물결이 닿는 모래 위에선 갈매기가 줄을 지어 논다. 시기가 아직 단풍이 들지는 않았더라도 가을 산도 멋졌다. 비록 직접 오르진 않았지만 진부령 중턱 쉼터에서 자는 애들을 차에 놓고 우리만 내렸다. 도시락을 먹는 노부부 옆, 구름 바로 아래에서 말없이 그리고 잠시 그렇게 있었다.
차 안에서 바라본 자작도 해변
루프탑에서 바다멍 하는 유나
아이들이 많이 어린지라 우리에게 놀거리는 수다뿐이었다. 특히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재미있는 이야길 많이 나눴는데초고에는 담았지만 아내의 검열로 지웠음을밝힌다.
중국의 작가 린위탕은 수필 <여행의 즐거움>에서 여행의 세 가지 모습을 비판한다. 마음 수행을 위한 여행, 나중 이야깃거리를 위한 여행, 미리 세운 일정을 지키기 위한 여행.그러면서 일상을 잊고 낯선 곳에서 방랑과 유혹 그리고 모험을 즐기는 여행을 권한다. 좋은 말인데. 아이를 데리고 하긴 쉽지 않다.그래서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우리만의 원칙을 세웠다. 계획 없이 무리하지 말고 욕심부리지 말자. 아이들 컨디션과 우리의 입맛 그리고 날씨에 따라 그때그때 발길 가는 대로 살았다. 다정하고 상냥한 숙소 호스트와 우리 아이들에게 애정을 주고 스쳐간 수많은 인연들에 감사를 남기며 이번 여행기는 이렇게 마쳐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