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육아 여행, 이것은 육아인가 여행인가
24. 10. 13. (일) / 가을 여행 2
기대한 축제에서 기대하지 않은 하루를 보내고 돌아오는 차 안은 조용하다. 물 먹은 솜이 된 기분으로 주차를 한다. 저녁밥도 먹어야 하는데. 분위기를 살려보고자 짐짓 목소리를 높이며 아내에게 파이팅을 외치니 실소를 짓는다. “오빠, 이거 여행이 아니라 극기 훈련이었어?” 어린아이들과 떠나는 여행은 어떤 모습일까. 물론 아이들이 어리다 보니 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육아 여행은 주변으로부터 많은 부러움을 받았다. 가을 바닷가에서 열흘살이라니. 꽤 낭만적이지 않은가. 실제로 멋진 풍경들을 보고 맛있는 음식도 먹는다. 그런데 왜 우리는 맥이 빠지나.
일단 환절기엔 아이들이 쉽게 아프다. 이번엔 아내까지 아팠다. 5일 차에 둘째는 39도가 넘었고 아내 또한 두통과 코막힘으로 잠을 자지 못했다. 감기는 우리 숙소를 하룻밤만에 낭만적 여행지에서 좁고 열악한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콧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뛰어놀고 싶었던 첫째는 갑갑했고 아내와 둘째는 무력했다. 이들을 돌보며 나는 우울했고. 다행히 하루 만에 증세는 많이 호전되어서 가벼운 외출은 할 수 있게 되었지만 하루의 모습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아침 산책 장소가 놀이터에서 해변으로 바뀌었다는 것. 분유를 먹이고 등을 두드리는 걸 침대 위에서가 아니라 카페에서 한다는 정도. 출발 전부터 기대했던 장면이지만 온 정신이 애들에게 팔려 있으니. 감동이 기대만 못하다.
여행 7일 차에 인터넷을 살피던 아내가 강원도의 축제 일정을 발견한다. 여행 기간에 진행된 축제가 여럿 있었다. 지나간 축제를 아쉬워하면서 내일은 인제군에서 열리는 국화꽃 축제에 가 보자고 하였다. 평지에 꽃 축제니 아이들을 데리고 가기도 좋지 싶었다. 아침부터 채비하여 달려간 축제엔 사람이 정말 많았다. 축제장 입구부터 첫째가 유모차에서 내려 달란다. 꽃을 뜯으려는 아이를 막는다. 포토존에서 포즈를 취한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고 곰돌이 조형물에 호기심을 보인다. 잠깐이지 싶었는데 한참을 비키지 않으니 눈치가 보인다.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 엄마가 끌고 나오니 울면서 떼를 쓰다가 데굴데굴 구른다. 몽니 부리는 꼬맹이가 군중의 관심을 받을수록 우리 부부의 낯도 뜨거워진다. 울퉁불퉁한 흙바닥 때문에 유모차는 덜컹거렸고 둘째의 잠투정이 절정에 이른다. 거의 입구에서만 진땀을 흘리다가 끝내 발길을 돌렸다. 돌아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드론과 강아지 그리고 국화꽃. 관심이 생기는 대상이 보일 때마다 제자리에서 발을 떼지 않는다. 3분 거리가 30분이 걸린다. 아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실망한 아내를 위로하려 주변을 검색하니 만해 마을과 시집 박물관이 있다. “여기 가 볼까?” “애네를 데리고, 박물관에?” 아, 한용운 선생님. 저희는 여행을 왔지만 여행을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떼쓰기는 이어진다. 낮잠을 재우려는 엄마와 영상을 보여달라는 아이 사이에서 아빠는 길을 잘못 들었다. 진부령이 어디지? 지도를 보니 좀 돌아가는 길이다. 어차피 애들도 자야 하는데 드라이브나 하자. 단풍이 들기 시작한 가을 산을 넘어 간성읍에 들어오니 여기선 명태 축제가 열린단다. 이렇게 된 거 여기나 가 볼까. 김밥을 사서 차에 들어오니 잠에서 깬 두 녀석이 강성으로 울고 있다. 축제고 뭐고 애들부터 달래자. 근처 공원에 차를 세웠다. 김밥 한 알 먹을 틈도 안 주고 유나는 놀이 시설로 달려 나간다. 내가 둘째를 먹이는 동안 아내는 첫째를 돌보다 온다. 배고프고 진이 빠진다. 오늘따라 어느 하나 따라주지 않는 유나가 야속하단다. “오늘은 유나만 신났네”"쟤한텐 놀이터가 여행이지 뭐." 이번 강원도에서 유나의 여행은 어땠지?
"당신에게 있어서 여행의 의미는 뭐야?" "일상에서 벗어난 하루."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내의 대답에 헛웃음이 난다. 지금 우리에게 육아란 일상 그 자체인데 육아 여행이라니.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아이를 데리고 가면서도 우리 마음속에 기대가 있었나 보다. 낯선 곳이면 좀 다르겠지. 아이들을 육아 대상으로만 바라볼 뿐, 여행의 동반자로 생각지 않으면서 우리 하고 싶은 것에만 기대를 걸었다. 두 돌 된 아이에게는 처음 보는 꽃을 만지는 게, 사진을 찍는 것보다 새로운 시소를 타는 게 여행일진저. 국화 축제니 명태 축제니가 무에 즐겁겠는가. 애들을 먹이고 재우는 일정에만 끌려다니는 게 싫다면서도 우리 여행에 아이들을 끌고 다니려 했으니. 줄다리기 같은 여행에 감동이 있을 리 없겠다.
우리 욕심에 애들도 여행 동안 고생했지 싶다. 이해해 다오. 우리 넷이 여행을 처음 온 것처럼 아빠 엄마도 부모가 처음이니. 일단 육아 여행이란 말부터 바꿔야겠다. 부부의 육아 여행이 아닌 온 가족의 여행으로. 얼마 남지 않았지만 내일부터는 가족 모두가 좋아할 곳을 가야지. 유나가 모래 놀이를 좋아하니 해변 카페를 또 가보자. 둘째가 자는 동안 교대로 첫째와 놀아주면서 잠깐씩 여유도 맛보겠지. 이나는 자주 안아 들고 바닷바람을 쐬어 주어야겠다. 식상한 모빌보다는 갈매기에 더 눈길을 주지 않으려나. 다음 여행에서는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소재도 좀 더 늘어날 테지. 훗날 남쪽 바닷가에서 온 가족이 백석의 첫사랑 이야기로 밤을 새우는 날을 기대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