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같은 모습으로 다시 오는 파도는 없더라
24. 10. 09. (수) / 가을 여행 1
점심으로 주문한 칼국수를 기다리는데 어머니께 전화가 온다. 여행은 어떠냐는 물음에 힘들다고 했다. "유나가 어린이집을 안 가요." "아니 여행 중에 어린이집을 왜 가?" "그러니까 힘들다니까요." 한 박자 뒤 수화기가 웃음소리로 가득 찬다.
동반 휴직의 특권이 뭘까. 아무래도 주중 시간을 부부가 함께 보낸다는 점 아니겠나. 퇴직 전까지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있을지. 날이 선선해질 때 가을 여행을 가 보자. 좀 길게. 지인 소개로 강원도 고성의 숙소를 빌렸다. 유아 둘을 데리고 가는 열흘살이는 준비부터 쉽지 않다. 우리가 묵을 곳은 쿠팡의 로켓배송 지역이 아니었기에 분유와 기저귀를 비롯한 육아 용품만으로도 이미 트렁크가 찬다. 체류가 길어지니 쌀과 김치 같은 부식도 챙긴다. 부부 두 사람의 짐은 캐리어 하나에 최소한만 넣는다. 거기서 다 소비하면 오는 길엔 가볍겠지. 이솝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테트리스하듯 짐을 싣는다.
꽤나 꼼꼼히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장소를 옮겨 애들을 보려니 곳곳에서 암초를 만난다. 여행을 간다고 애들이 달라지진 않으니까. 숙소는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지만 애들 빨래가 만만찮은데 세탁기 용량이 적다 보니 여러 번 돌려야 한다. 여행지가 집만큼 편할 순 없겠지만 아프면 더 힘들다. 콧물 흡입기를 놓고 왔는데 오자마자 아이들이 코감기 증세를 보인다. 코가 막히니 밤에 푹 자질 못한다. 짜증과 신경질이 부쩍 는다.
셋째 날은 비가 왔다. 하루 네 번 분유를 먹던 둘째가 생전 처음 다섯 번째로 야식을 찾는다. 새벽 1시에 수유를 하고 6시까지 10여 번을 깬다. 쪽쪽이를 물어야 자는데 콧물 때문에 숨쉬기 힘들어서인지. 6개월짜리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옆에서 잠을 못 잔 나도 죽겠는데. 장을 보러 속초 이마트에 간다. 첫째는 장난감 앞에서 떼쟁이가 되었다. 수조 앞에서는 뻐끔거리는 킹크랩을 먹고 싶다고 아예 드러눕는다. 꽃게도 안 먹어봤으면서. 둘째가 탄 유모차에 쇼핑카트 그리고 드러누운 꼬맹이. 부부 둘이서 셋을 감당하기 어렵다. 급기야 차 안에서는 아예 악을 쓴다. 주차장과 소아과를 오갈 땐 유모차만 가리기에도 우산이 너무 작았다. 추적추적 젖은 채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씻기고 씻었다. 저녁밥도 편히 먹지 못했지만 재우기는 더 어렵다. 자다 칭얼거리기를 반복하는 첫째와 씨름하길 한 시간, 인내가 무너지며 “으-악” 절규를 뱉는다. 가을 바다로의 여행. 선선한 공기 속에서 거니는 산책, 멋진 풍경, 낯선 공간에서 환기되는 생각들, 이런 기대만큼은 아니더라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넷째 날인 오늘부턴 일어나자마자 카누 커피를 마셨다. 생각해 보니 어젠 커피를 안 마셨네. 유튜브로 타바타 영상을 틀어 놓고 아내와 함께 운동도 하니 정신이 맑아진다. 빨래, 청소, 설거지를 마치고 점심 메뉴로 바지락 칼국수를 골랐다. 여긴 함께 시킨 산나물전이 맛있었다. 추천받은 카페는 유명세만큼 바다 경관이 멋지다. 30분쯤 지나니 첫째의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유나를 안고 파도 앞으로 나왔다. 금세 모래장난에 빠진 아이 옆에서 물결을 보노라니 잡념도 다가오다 부서진다. 엉덩이를 깔고 아이와 나란히 앉는다. 그러길 한참, 가만 보니 파도는 앞 물결을 덮으며 밀려오지만 그 모양은 각기 다른 꼴이다. 얼마 전에 책에서 본 헤라클레이토스의 격언이 떠오른다.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강물은 늘 흐르니 발을 넣을 때마다 같은 강이 아니겠지. 강물이나 파도처럼 매양 같아 보이는 일상도 그렇겠다.
옆에선 초등학생처럼 보이는 남매가 발을 벗고 밀려오는 물결에 연방 다가갔다 도망친다. 오빠는 바짓단이 젖었고 동생은 이내 풍덩 빠진다. 우리 애들이 저만쯤 되면 여행이 어떨까. 자기들끼리 놀 테니 지금처럼 아빠만 찾진 않겠지. 사춘기가 되면 나보다 친구들과 가고 싶어 할지도. 파도가 무서워서 내 품으로 파고들며 어눌하게 "아빠"를 찾는 유나와 가을 여행은 오직 지금뿐이구나. 잠깐의 상념이 더 이어지지 못한다. 나는 앉아 있고 싶은데 아이는 제가 원하는 곳으로 달려 나간다. 해변에서 카페로 올라오는 모래 언덕이 가파르다. 안아 주겠다고 해도 한사코 자기가 오르겠단다. 몇 번 넘어지더니 아예 기어서 숫제 제 힘으로 언덕을 오르고야 만다. 어쩌면 내 생각대로만은 아닐지라도, 이 녀석은 이미 제 색깔로 자라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 부부는 아이들이 저마다 고유한 삶을 살아가길 소망한다. 평범하지만 똑같지 않은 일상이 밀려오고 밀려간다. 그런 하루의 반복 속에서 우리와 함께 아이들의 삶 또한 각기 영글어 가겠지. 시기마다 달라져야 할 부모의 역할을 고민하다가 다시 달려 나가는 아이의 뒤를 쫓아 나간다. 우리들의 삶을 위한, 평범하지만 다시 오지 않을 매일에 축복을. 그리고 일상을 돌아보게 한, 여행이 선물한 여유에 감사를. 물론 보나 마나 내일 아침에도 "아이고, 죽겠다"를 외치며 일어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