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 분개하는가
24. 10. 05. (토)
내일 고성 바다로 열흘살이를 떠나기에 앞서 아침부터 채비를 궁리한다. 준비 목록을 점검하고 빨래도 남기지 않으려고 아기옷, 어른옷을 구분 없이 돌린다. 음식도 남기지 않고자 점심부터 단출히 차렸더니 저녁때가 되어 허기가 커진다. 에라 둘째도 재웠겠다. 오늘부터 여행이라 생각하자고 아내와 낄낄대며 치킨을 포장했다. 배가 부를 때 첫째 유나가 졸린지 칭얼거리기 시작한다. 보통은 내가 들어가는데 오늘은 아내가 재우겠다고 자원을 한다. 엄지를 들어 보이고 스마트폰을 보며 식은 치킨을 뒤적였다. 한참 뒤 방에서 나온 아내 목소리에 날이 섰다. “빨래라도 좀 개어 두지. 당신이 유나 재울 때 내가 논 적 있어?”
마른풀로 뒤덮인 가을 들판에 불씨가 닿으면 무섭게 탄다. 몇 번이고 오가던 서로의 말씨는 이내 불씨가 되고 몇 달간 가라앉은 앙금이 바람이 되어 불길을 퍼뜨린다. 연애 초반에만 하더라도 아내는 나를 상대로 말다툼을 잘하지 못했다. 십여 년이 지난 이제는 절대 고수를 마주한 기분이다. 아내의 논박에 약점을 찔리면 아픔을 참고 새로운 쟁점에서 논리를 세우며 허점을 찌른다. 설검(舌劍)이 휘둘러질 때마다 서로의 상처만 늘어갈 뿐. 어차피 승자가 없는 다툼임을 서로 알기에 격앙된 감정을 붙잡고 대화의 요점을 복기하길 수차례. 우리는 서로의 노고를 몰라주는 서로에게 섭섭하였다. 적고 보니 좀 유치하네.
육아 휴직을 하면서 아내와 하루 온종일을 함께 보낸다. 그리고 우리는 그 대부분을 육아와 살림을 함께하는 동료로서 살아간다. 동료와의 과제가 보통 그러하듯 제로섬 게임처럼 내가 편하면 상대가 남은 짐을 짊어지게 된다. 애를 키우는 모든 가정이 다 비슷하리라. 다만, 함께 휴직하며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노라면 앙금이 더 빨리 쌓이는 듯하다. 말로 하면 쪼잔하달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첫째를 낳고 허둥거리며 티격태격하는 우리 부부에게 장모님께서 말씀하셨다. “지금은 여유가 없어서 그래.” 우리의 말다툼은 점점 옹졸해졌고. 라면 속 계란을 양보한 사례를 언급하기까지 이르렀다. 대개의 말싸움이 그렇듯 한 번 웃음이 나면 분위기가 풀리기 마련이다. 계란이 풀어준 분위기 속에서 내가 먼저 말했다. “내가 아닌 역할로서만 살게 되니 마음의 여유가 예전 같지 않네. 휴직한 지 나는 고작 3개월인데 당신은 오죽하겠어.“ 매 순간을 내가 아닌 누군가의 부모, 배우자로서만 살아가는 생활에 마음 그릇이 차츰 줄어들고 있었다. 출근과 육아를 병행할 때에 비하면 몸은 훨씬 편한데. 나답게 나로서 사는 삶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느낀다. 이 생활을 2년째 하고 있는 아내는 ‘역할로서만 사는 삶’이란 말을 곱씹다 벌떡 일어선다. “이 소재는 내가 쓸 거야.”
출발을 8시간 앞두고 우리는 경쟁하듯 키보드를 두드린다. 빨래라도 미리 개어야 하는데. 출발 시간을 맞추긴 글렀다. 그래 좀 늦게 가면 어때. 아까 치킨 먹을 때부터 여행은 시작됐는걸. 서로의 옹졸함을 놀리며 옹졸해진 상대를 보듬는다. 마음을 쪼그라뜨리는 바람을 누구 혼자 맞지 않았으니 네 모습이 내 모습이다. 시인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는 옹졸함을 반성하지만 그 비판 의식을 여기서는 슬몃 감춰본다. 아이들과 함께 우리 마음의 도량도 조금씩 자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