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님아, 그 복권 긁지 마오
25. 1. 1. (수)
새해가 밝았다. 연말엔 행사가 많은데, 결혼 전부터 본가와 처가 모두 한 해의 말일 저녁에 이벤트를 해왔다. 12월 중순부터 중이염과 감기로 아픈 아이들과 때문에 올해엔 그냥 우리 집에 있기로 했다. 아내 또한 감기에 걸려 기운이 없지만 몸 상태와는 별개로 집에만 있으려니 못내 아쉬운 눈치다. 그래서 새해 해돋이를 보자 하였다. 보통 해맞이는 산에 오르거나 바닷가에서 하기 마련이지만 해는 우리 동네에도 뜨니까. 그래서 현관문 앞에서 보기로 했다.
우리 집은 정남향이자 동쪽 끝 집이다. 현관 앞 복도에서 동쪽을 보면 야트막한 산이 하나 있는데 그 위로 해가 뜨려니 싶었다. 기상청에서 알려주는 일출 시간이 7시 46분이라기에, 20분 전에 자고 있던 아내를 깨웠다. 본디 둘만 나가 보려 했는데 아내와 자던 첫째도 깼다. 셋이서 옷을 입고 텀블러에 카누 커피를 담았다. 카메라 삼각대를 챙겨 밖을 나서니 첫째 유나는 나간다고 신이 났다가 문 앞에만 있으니 어리둥절. 해뜨기 전 가족사진을 찍고 기다렸다. 예정 시간이 지났는데 해가 보이지 않는다. 구름을 보니 여간 두꺼운 게 아니다. 80년 대학가요제에서 은상을 받았다는 마그마의 '해야'를 틀어 놓고 해를 기다린다.
8시가 넘어서고 정동이 아닌 동남 편 하늘에서 구름 사이로 빛이 점차 밝아지다 붉어진다. 그리고 선명한 진홍빛이 구름 사이에 어리는데 해인지, 햇빛인지 분간이 안 간다. 아내와 첫째가 먼저 들어가고 나는 조금 더 지켜보다 들어왔다. 그새 둘째가 깼다. 아까 커피를 타며 불려둔 떡살로 떡만둣국을 끓였다. 유나를 먹이는데 아내가 묻는다. "유나야, 엄마 아빠가 끓인 떡국 맛있지?" "엄마가?" "내가 냉동실에서 만두도 꺼내고 간도 봤으니까" 코웃음과 함께 아침을 먹고 청소를 했다. 양가 부모님께 영상통화를 하고 나니 할 게 없다. 애들을 재우며 우리도 슬슬 누웠다.
오후에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동생이 꿈을 꿨다는 첫마디를 듣고 "안 돼"를 외쳤다. 동생이 크고 화려한 구렁이가 집안에 들어오는 꿈을 꾼 뒤로 첫째가 생긴 걸 알았다. 둘째 태몽은 아내 몫이었지만. 어쨋든 셋째는 안 된다는 심정으로 나머지 이야기를 들었다. 학이 내 품으로 날아드는 꿈이었단다. 통화를 마치고 Perplextity에 검색해 보니 크게 세 가지 의미로 풀이된다. 첫째는 태몽이다. 학자나 성직자가 될 자식(일부에서는 여아)을 낳을 징조란다. 둘째는 관계와 관련된 징조이다. 귀인이나 학문, 지혜가 뛰어난 사람을 만나게 된단다. 셋째는 개인적인 성장이다. 새로운 지식이나 학문적 성과 또는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성장을 이루게 된단다. 풀이는 이렇고 셋 중 무엇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새해 첫날부터 길몽이 있다면 복권부터 사야지 않겠는가? 그래서 난생 두 번째로 복권을 샀다.
로또와 연금복권을 샀다. 아내와 내가 아는 게 그것뿐이니 즉석 복권 같은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집에 와 저녁을 먹은 후 설거지를 하는데 아내가 연금복권을 언제 긁을지 묻는다. "어? 긁는 게 있어?" "여기 긁는 곳이 있어" 스크래치 아래에 QR코드가 있단다. 아 그걸 스마트폰으로 찍으면 당첨 여부를 쉽게 확인하나 보네. 방송에서 로또 확인을 그렇게 하는 걸 본 것도 같다. 아내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 스크래치에서 떨어진 거스러미가 귀찮은지 물티슈로 닦아가며 열심히 긁는다. 설거지를 마치고 보니 스크래치 아래에 바코드가 두 개 있고 그 사이에 경고문이 있다 '바코드 훼손 시 당첨금 교환 불가' 뭔가 느낌이 쎄 한데?
네이버에 검색을 해 보니 연금복권은 스크래치 위에 있는 번호로 당첨 여부를 조회해야 하며, 그걸 긁으면 당첨금 지급이 안 된단다. 우리 같은 사람이 참 많은지 검색하자 최상단부터 줄줄이 긁지 말라는 조언이다. 복권을 살피니 처음엔 깨끗이 긁다가 귀찮았는지 이내 바코드 부분만 빼꼼히 드러내 놨다. 10장 모두.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실 웃었다. 아내는 부정적인 일을 당한 사람의 전형적인 5단계를 차근차근 밟아 간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감, 납득. "진짜야?", "아니 경고문이 앞에 크게 있어야지", "1만 원 날렸네"부터 "우리 당첨 확인하지 말자"까지 저녁 내 우울하다. 당첨이 되면 우울에 파묻힐 기세다. 새해 첫날부터 이럴 순 없지. 생각을 뒤집어서 이제 우리는 떨어지길 빌어 보자. 갑자기 실현 확률이 확 올라간다.
열 장의 복권은 2개의 일렬번호에서 각각 5개 조로 이루어졌다. 당첨액이 1만 원을 넘어서는 5등부터 1등까지 당첨 확률은 0.2%다. 그럼 99.8%로 낙첨이 이루어질 테니 우리는 얼마나 운이 좋은가. 시인 박두진의 <해>에서 해는 일체의 부정을 몰아내고 희망과 화합의 공동체를 회복시킨다. 우리 가족만 보면 작년은 상반기엔 출산, 하반기엔 육아라는 큰 일들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지치고 상하는 일들이 잦았다. 새해엔 우리가 복직을 한다. 1학기엔 내가, 2학기엔 아내가. <해>에서처럼 새해엔 잠시 떠나 있던 일터와 우리 가정의 생활이 조화를 이루는 '앳되고 고운 날'이 가득하길. 우리는 운이 좋으니까. 그러니 제발 떨어져라.